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를 말씀 한마디로 낫게 하는 기사를 보면 우리의 관심은 솔직히 오직 주님의 그 크신 능력에만 쏠립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신자라면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는 영적 진리 하나는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크고 풍성한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꼭 풍요롭게 살려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 병이 들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만이라도 그 고난에서.. 요한복음(68) 끝까지 사랑하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정권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베(catacombe), 지하 묘지에 숨어 살면서도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 그 모진 고난들을 다 이겨냈다. 어느 카타콤베의 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카타콤베.. 요한복음(67)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왔다”
근래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심판’인 듯하다. 정치적으로 그만큼 안정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요란한 아우성인 심판 주장이 이중잣대(double standard)이자 내로남불이라는 데 있다. 세계적으로는 기후 재앙으로 곳곳에서 난리다. 신자들은 이 기후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불신자들은 이 기후 재앙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무시.. 요한복음(66) 오직 하나님께 영광!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셔서 계속 말씀과 표적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들만 믿을 뿐 상당수의 유대 엘리트들과 출교(excommunication)가 두려운 많은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은 이런 현상을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미완료태를 쓴 것은 .. 누가 침묵했는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 7일간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흔히들 이해합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분명히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행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모든 사람이 침묵하긴 했어도 어쨌든 완전한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65) 십자가, 영광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로 시작되는데(27-28절) 어떤 기도를 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며 함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한다. 그래서 기도 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다. 묻는다. 기도가 사랑의 소통인가? 아니면 일방적 요구인가? 어떤 사람은 기도만 하면 운다.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지만 상갓집 아르바이트형 기도라면 곤란하지 .. 요한복음(64) 나를 따르라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마치 최고의 인기 스타 같으셨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내신 분! 사람들은 옛날의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셨다고,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이 오셨다고 좋아하고 흥분하고 난리다. 벳새다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저 분만 따라다니면 절대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까지 .. 요한복음(63)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열광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아, 능력있는 왕으로 연호한다. 아마 예루살렘 주변에서 야영하던 순례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 대열에 참여한 것 같다. 2장과 6장에 이은 세 번째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의 입장도 무리의 태도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사건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 하지만 그날의 입성은 열렬한 환영 속에서의 입성이었다... 부활을 믿는 불신자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베풀고 있다는 소문이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헤롯 안타파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자기가 죽였던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럼 여호와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불신자였던 그가 부활을 믿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평생 풀리지 않는 과제
신앙 연륜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항상 미진(未盡)하게 다가오는 숙제가 있습니다. 왜 나의 믿음은 조금만 주위 여건이 힘들어지면 불안과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죄의 문제는 어지간히 이겨낸 것 같고, 또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화려하고 풍요한 인생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지 오래이며 주님을 위해 살려고 헌신하고 있는 중.. 요한복음(62) 예수를 위한 잔치
표적의 책 마지막 장인 12장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유월절, 히브리어로는 ‘페사흐’(פֶסַח), 헬라어로는 ‘파스카’(πάσχα), 출애굽하던 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했기에 ‘죽음이 넘어갔다’라는 의미로 생긴 말이다.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 over), 이스라엘의 민족 해방절, 유대 명절.. 참 부흥을 맛보고 있는가?
구원은 골고다에 흘리신 예수님 보혈의 대속적 공로를 믿기만 하면 얻습니다. 다른 어떤 자격, 조건, 공적, 행위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 본인 단 둘만의 인격적 체험적 대면을 통해 자기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얻었는지는 본인과 하나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제 삼자가 개입, 영향을 전혀 끼칠 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61) 엇갈린 반응
분열의 골이 너무 깊다. 우리 사회는 아예 분열이 고질병 된 것 같다. 본문에도 심각하게 분열된 고질병 증세가 나타난다. 늘 그랬듯이 기적의 결과는 분열,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반응이 엇갈린다. 사도 요한은 먼저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45절). 나사로 부활 현장에 있던 유대인의 일부지만 요한은 그들의 수가 많았다고 했다... 요한복음(60)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이 큰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한 마디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절),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나오라’는 명령 때문인데 그 과정이 은혜롭다... 요한복음(59) 예수께서 우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부활로 바꾸시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다시 장례식 분위기로 돌아간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KJV으로 보면 “Jesus wept”,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짧은 절이다. 우실 분이 아니다. 죄를 지은 분도 아니고, 약한 분도 아니다. 하나님이시고, .. 요한복음(5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장례는 이미 끝이 났다. 중동지역은 기온이 높기 때문에 흔히 사망한 바로 그날 굴속에 매장하는데 이미 나흘,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인 두 자매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많은 유대인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장례식 내내 중동 여인들 특유의 애곡 소리가 집안을 울렸을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중대 선언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 거룩해질 수 있는 비결
일부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가 소외층과 빈곤층에 대한 섬김을 가장 강조하는 이타적 종교임은 자타가 인정합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선행과 구제가 마치 기독교의 핵심인양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깊은 의미를 모르는 외부인이 볼 때는 그럴 수 있다지만 간혹 신자들마저 그럽니다... 요한복음(57) 나사로가 죽다
11장에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번째 표적,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 공생애의 클라이맥스, 이 기적은 그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기적(Biggest Event)였다. 그전에도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신 적은 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눅7:11-17),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가장 축복 받은 죽음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비로소 진정으로 복된 인생이 시작됩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이 땅을 벗어나 영원하고 완전한 빛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요한복음(56) 신성모독
류 윌리스(Lew Wallace) 장군은 자기 친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과학 문명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케케묵은 성경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장군이자, 언론인, 그리고 저술가였던 윌리스는 성경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성경을 손에 잡았고, 반박문을 쓰기 위해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