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이상원 교수가 10일 서울역 공항철도 회의실에서 열린 성산생명윤리연구소(소장 이명진)의 프란시스 쉐퍼 강연 4주차 순서에서 ‘생명윤리, 정치윤리, 환경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교수는 “서구의료계는 2000년이 넘게 히포크라테스 서약을 근간으로 해왔다. 이는 의사가 자살수단으로 사용되는 독약 처방을 금지하고, 여성에게 낙태를 유발하는 자궁전을 주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의료인들은 제네바에서 모여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나치 정권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제네바 선언을 공표했지만 기획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며 “제네바 선언은 신 앞에서 맹세하는 서약이 아니라 '선언'으로서 자기 입장을 밝혔다. 그래서 의료행위를 인간이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으로 세속화시켰다”고 했다.
이어 “또한 1971년 제네바 선언을 개정할 때, 생명의 시작점을 ‘잉태의 순간부터’라고 명시한 조항을 삭제했다. 생명의 시작점을 고무줄처럼 자유롭게 정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며 “실은 인간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히포크라테스 서약 이전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이 서구를 지배하면서부터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사실은 인간 생명을 독특한 것으로 생각하게 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이 소홀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계기는 서구사회가 인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부터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사조로서 인간을 우주 안에서 우연히 생겨난 결과물로 파악한다”며 “유물론적 인간관도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가치를 극적으로 떨어뜨린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포기하면 인간을 고귀하게 대우해 줄 수 있는 근거가 상실되고 온갖 형태의 비인간적 행위와 태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변화는 법의 영역에서부터 맨 먼저 감지되기 시작한다. 법의 토대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적 합의가 사라지면 남은 것은 사회학적 법인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곧 법이 된다”며 “그런데 다수 시민들의 의견은 현재 경제적이고 사회학적 선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소수 관료들에 의해 지배당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생명공학의 출현도 인간을 이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는 유전자 형태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사회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자질을 갖춘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해 유전자조작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할 하등의 이유는 사라진다”며 “이와 관련, 사회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의 구성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하며 모성애, 우정, 법, 도덕도 유전자 작용의 산물로 설명한다. 따라서 유전자를 조작하면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문제들 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포기한다면 온갖 유형의 비인간적 형태를 통제할 근거를 상실한다.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아동학대, 포르노, 정치범고문 등을 묶어 놓았던 고삐가 풀린다”며 “특히 낙태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유물론적 인간관으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대표적 폐해다. 1973년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리면서 새로운 인권 곧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열어놓았다. 대법원이 사적 권리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특히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는 ‘생명의 권리보다 사적 권리를 더 중시한 게 노예제도의 전제’라며 ‘이 전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이 판결은 미국의 모든 주에 있는 낙태규제법을 무효화시키는 초법적 결정을 내리기까지 했다”며 “낙태문제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점은 바로 태아가 인간인가의 여부다. 프란시스 쉐퍼는 수정란이 형성된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고 했다.
이어 “쉐퍼에 따르면, 동일하게 23개 염색체를 지닌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면 46개 염색체를 지닌 수정란 세포로 거듭난다. 이 세포는 일단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DNA를 갖추고 있다. 수정란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결국 쉐퍼의 입장”이라며 “그러나 쉐퍼는 낙태가 미끄러운 경사면 효과를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번 내리막길에 자동차 바퀴가 들어서면 자동차는 걷잡을 수 없이 굴려 내려가고 이를 막을 수가 없다는 이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쉐퍼는 낙태의 미끄러운 경사면 효과를 인식한 판결로 1975년 서독 대법원의 예를 들었다”며 “당시 대법원은 임신 12주 안의 태아 낙태를 요구한 사건에 대해 ‘만일 3개월 이내에 있는 태아에 대한 낙태를 허용하면 3개월 이후, 며칠 더 태내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낙태를 허용해 주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시켰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한 쉐퍼가 영아살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가장 명료하게 영아살해 지지 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의 레이몬드 더프(Raymond S. Duff)와 에이 캠프벨(A.G.M. Campell)일 것”이라며 “이 두 사람은 ‘끝이 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보이는 짐’으로부터 신생아의 부모들과 형제자매들을 구하기 위한 목적이면 신생아를 죽게 내버려 두어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들에게 신생아는 ‘몸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물건(built-in obsolescence)’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은 영아가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유용하면 달고 다니다가 거추장스러우면 떼어내 버려도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는 “이는 장애로 태어났음에도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하게 사는 장애자들의 삶의 현실을 무시한 행동이다. 장애자들이 원하는 건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라며 “영아살해는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는 허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이 원하지 않는 아이, 나아가 장애나 중증질환을 가진 성인까지 확대 적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특히 “예컨대 만성 심폐증이나 단장증후군 또는 다양한 형태의 뇌손상을 가진 영아를 죽도록 방치해도 좋다면, 동일한 질병을 가진 성인을 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영아살해란 ‘생존할 가능성이 없는 영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은 아니지만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는 영아들을 죽이는 행위’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 인간관에 대응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생명이 이미 태어난 생명이든, 태아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갈색 인종이든, 황색 인종이든 모두 존엄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며 “우리는 경제학이나 효율성의 도표를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임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또 “사람은 기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을 자행하는 유물론적인 로봇들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비인격적 시대에 도전장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라며 “그런데 생명에 대한 잘못된 관행을 기독교인들이 단순한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째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미혼모들과 낙태를 고려하고 있는 기혼모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미혼모들이 머무를 수 있는 거처가 있어야 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가질 수 없어 입양하고 있는 많은 부부들에게 이를 말해 주어야 한다”며 “미혼모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경우, 아이를 돌보는 방법에 관해 조언도 해주어야 한다. 미혼모들이 아이를 돌볼 쾌적한 시설들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또 “낙태 유혹을 받는 기혼모들에게 교회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태어날 아이 엄마가 워킹 맘일 경우, 아이를 돌보는 일을 교회가 도울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해 교회가 공동체임을 보여줄 수 있다”며 “교회가 보육센터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교회의 신도들이 아이들을 가정으로 데려다가 매주 일정한 시간동안 돌보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성경의 진리를 붙드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행해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사람들의 물리적인 필요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져야한다”며 “같은 원리가 영아살해문제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어떤 가족이 장애아를 낳은 후에 아이를 버리려는 유혹이 있을 경우, 교회는 가족과 아이에 대한 관심을 거두면 안 된다. 교회 신도들이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장애아의 가정을 방문하고 장애아를 돌보는 데 뒤따르는 어려움을 돕고 나눠야 한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