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지난 4일 오후 한국기독교회관에서는 '故 오재식 선생 3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오재식 선생은 평생을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빈민운동, 평화 통일에 헌신해 사회운동의 모든 현장에서 존경 받았던 인물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섰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 선생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앞장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 등에서 활동하셨으며, 구호단체 월드비전 북한 국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대북지원 활동과 평화 통일 운동에도 헌신했다.
한편 행사에서는 서광선 목사가 추모예배 설교를 전했다. 다음은 "최후의 심판 날에"(마25:31~40)란 제목의 서 목사 설교문 전문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마태복음 25:31-40)
1. 최후의 심판 날, 조금 전에 봉독한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에 쓰인 대로, 예수님은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31-34절) 했습니다. 양 떼가 자리 잡은 데를 자세히 보니, 맨 앞에 우리가 잘 아는 김재준 목사님이 서 계시고, 그 다음으로 강원용 목사님, 그리고 김관석 목사님과 문익환 목사님이 나란히 서 계신데, 놀랍게도 강문규 선생이 부끄러운 듯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좀 떨어져서 오재식 선생이 강문규 선생처럼 머리를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아마 목사님들 틈에 두 평신도가 서 있는 것이 송구스럽고 부끄러워서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은 다른 분들에 대한 칭찬을 하시고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이 말씀을 따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낙원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우러러 보면서, 오재식 선생은 최후의 심판장이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2. 최후의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보좌에서 내려와 친히 오재식 선생의 어깨를 잡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오재식 선생, 선생은..."하고 말씀을 시작하자마자, 오 선생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오 선생, 오 선생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어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오재식 선생은 예수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제가 언제 예수님에게... 언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 저는 주님을 직접 뵌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재식 선생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장이신 예수님은 모두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오재식 선생은 만 64세, 많은 사람들이 은퇴하는 나이에 한국 World Vision의 회장으로 취임해서 온 세계의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구제하는 사업을 맡아 보았습니다. WCC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들은 오재식 선생이 이른바 보수 구호단체인 선명회에 간다고 비판도 하고 "배신자"라는 말까지 했는데도, 좋은 일을 하는데 보수와 진보가 어디 있느냐, 아니 나는 평양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의 후예라고 자부하면서 World Vision의 회장 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까지 만 8년 동안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동포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고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가는 기술과 시설까지 개발하게 했습니다. 국수공장을 북한 땅,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에 한 군데, 평안남도에 두 군데, 강원도 원산에 그리고 함경북도에 한 군데, 이렇게 다섯 동네에 세웠습니다. 중국에서 밀가루를 사다가 국수를 뽑아서 국수가 마르기 전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을 모아다가 하루 한 끼씩 배부르게 대접했습니다. 국수 말리는 기계나 공장을 따로 짓지 않은 이유는 건조한 국수는 상품이 될 수 있고 또 누가 어디에 실어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 처사라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북한의 2천만 인민이 배고파 굶주리고 죽어 가는 마당에 최신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감자를 재배하게 해서 일 년에 400톤이 넘는 감자를 생산해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배를 채우게 했습니다.
감격에 떨고 있는 오재식 선생에게 예수님은 그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북한에 사는 너의 형제자매와 굶어 죽어가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재식 선생은 떨리는 음성으로 응답합니다. "그거 제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과 동지들과 함께 한 겁니다. 북한 땅의 현장이 나를 불러들인 겁니다. 북한의 외교부 사람들, 북한의 교회 목사님들, 그리고 북한의 농업연구원 사람들이 도와주어서 한 일입니다. 그리고 World Vision이 제 생각을 받아 주어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를 이토록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3.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다시 보좌에 정좌하시고 오재식 선생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자네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만드는 법까지 가르쳐 주고 시설을 만들고 공장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나를 위해서 구명 운동도 하고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 때 나를 가둔 사람들이 나를 빨갱이라고 하고 너의 나라 반공법을 어기고 반정부라고 나를 잡아다가 죽도록 고문하고 감옥에 쳐 넣었다. 내가 로마제국의 죄수들이 지고 매달려 죽은 십자가 경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고문과 수모를 당하고 죽을 뻔 했지 않았는가?"
오재식 선생은 다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주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 한국 감옥에서 고생하셨습니까? 저는 우리나라의 젊고 어린 학생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욕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저지른 부정선거에 반대해서 4.19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면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장군이 군인의 신분으로 정권을 총칼의 힘으로 잡고 평생 유신독재 정권을 해 나가려고 하는 것을 막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반대하는 학생들과 지식인들 편에 서서 일본에서 미국에서 스위스에서 일한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일도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WCC의 친구들, 독일의 친구들, 일본 친구들, 그리고 특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시던 지명관 선생님, 그리고 강문규 형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주님이 언제 한국의 감옥에서 고생하셨습니까? 저는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오재식 선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항의하듯이 재판장 예수님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잔잔하고 자비로운 음성으로 오재식 선생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후배 학생들, 안재웅 군과 나병식 군 등 KSCF의 기독학생들, 오 선생의 동지들과 선배들, 김관석 목사, 서남동 목사, 안병무 박사, 문익환, 문동환 박사 같은 이들이 정보부에 잡혀 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네가 밖에서 한 일이 바로 나에게 한 일이다. 저들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나의 친구들이다. 네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일한 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 한 일이다. 너는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 동지다...."
4. 재판장 예수님은 오재식 선생의 심판이 끝난 것으로 하고 최후 판결을 내립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대로 "내가 분명히 말한다. 네가 여기 있는 형제자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 "너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해서 준비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그러나 오재식 선생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안내원이 오 선생의 손을 잡고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순간, 조용히 물리치면서 재판장 예수님을 우러러 입을 엽니다.
"예수님, 제가 시작한 일이 있는데,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의 평생소원이 분단으로 신음하는 우리 한국 땅과 한국 민족이 평화롭게 살다가 한 나라로 통일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 광주민주혁명이 일어난 후 우리 민족과 우리 고통당하는 남과 북의 민중과 함께 평화 통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88선언을 만들고 한국 NCC는 이를 만방에 선포했습니다. 7.4.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통일 3대 원칙, 평화, 자주, 민족대단결 위에 인도주의적 원칙과 민중의 통일 운동에의 참여 등 2가지 원칙을 더하여 5대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남북 정부에 청원하기를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군축을 감행하고 핵무기를 금지하고 미군이 철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88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한 가지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88선언에는 1995년 분단 50주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고 그날까지 통일을 이루자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1995년 이후 20년이 지난 오늘 까지 분단의 철조망은 더 높아지기만 합니다. 예수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 질 때까지, 저는 주님이 마련하신 낙원으로 들어가서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다시 보내 주시옵소서...." 오재식 선생의 눈물 섞인 호소는 간절합니다.
"아니다."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너의 간절한 마음이 나를 감동시키는구나. 이젠 내가 가서 네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겠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나를 알아 볼 때까지 너의 후배들과 함께 네가 하던 일을 하도록 하겠다. 너는 하늘나라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여라...."
2016년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보다 먼저 가신 오재식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다시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분단의 한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민중 가운데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