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박사
김경재 박사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한 일

우리 사회와 겨레가, 아니 말 없는 지구촌의 수많은 억압받던 사람들이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던 메시지였던가? 작가 한강이 그의 작품 「채식주의자」,「작별하지 않는다」,「소년이 온다」 등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은 특히 한국민에게 엄청난 기쁨, 치유, 자기 성찰의 기회를 선물하였다. 필자에게도 그랬다.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에는 인간성의 피폐된 반인륜적 사건들이 많았고, 정치계와 남북관계의 혼란과 이전투구에 병이 날 정도로 심신이 괴롭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참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여름 땡볕에 시원한 소낙비 같은 청량감을 주었다.

출판계만 아니라 어려움 겪으며 가게문을 닫지 않고 버텨오던 서점들도 생수를 마신 듯 생기가 돋는 듯하다. 이러한 밝고 좋은 ‘한강 신드롬’이 일과성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맘이 간절하다. 그런데, 그 즐거움의 감정을 누리면서 일주일이 지난 무렵부터 내 마음에서 양심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이러했다: “너 한국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즐거워하기만 할 것인가? 한국신학,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가 부끄러워해야 할 계기가 아니냐? 종교개혁주일이 다가오는데 너희는 왜 일반인들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거나 성찰하지 않느냐?”

한강 씨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를 심층분석한 전문적 문학평론가들의 깊이 있는 견해를 압축하여 정리하면 다음 3가지였다. 첫째, 한강의 작품들은 애국, 정치적 이념, 의로운 전쟁이론을 명분 삼아 개인 인간의 삶을 비인간화시킨 거대담론 소설과 다르다. 국가의 폭력성에 희생되어 온 사람들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고발하고 맞서서 인간 삶의 연약함과 존엄성을 정직하게 보여준 작품이라는 것이다. 둘째, 한강은 작품을 통하여 고통의 문학, 아니 고통의 역설, 고통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자의 고통을 체제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무능력으로 돌리지 않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연대하면서,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동병상련하면서 고통을 줄이려는 작은 실천에 인간의 인간다움과 존엄성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소설의 문체에 있어서 전통적인 주류문학이 답습해온 가부장적, 남성적, 이성적, 논리적, 정답을 다 아는 듯한 문체에 저항하면서, 서정성과 합리성을 조화시키고 삶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강하게 대변한 점이 특색이라고 한다.

작가 한강 씨에게서 받은 필자의 감동은 위에서 언급한 전문적 문학 평론가들의 해설과 별도로 그의 겸허한 작가로서의 자세가 감동을 주었다. 언론사나 출판계의 인터뷰를 사양하고, 고향 사람들의 축하 잔치 제안마저도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잔치는 무슨 잔치인가요?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상을 준 것은 축하 잔치를 하라는 것 아니고, 더욱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문학으로서 드러내라고 준 것이에요”라는 겸허한 맘가짐이다. 언론의 조명받기를 지나치게 원하고 명예욕과 자기과시를 목말라하는 종교계 지도자나 정치계 지도자들의 천박한 욕망을 잠시라도 부끄럽게 만드는 뜻깊은 한강의 결단이 돋보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금관을 쓴 예수를 가시관을 쓴 예수로 복원하는 사건

1516년 10월 31일을 개신교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기념주일로서 지킨다. 종교개혁 정신이란 무엇인가? 독일 시골 도시 비텐베르크의 작은 수도승(修道僧) 마틴 루터의 마음에 무슨 근본질문이 있었길래 ‘95개조 토론 의제’를 교회당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발표했는가? 핵심적 질문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허물어진 거룩한 성당들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위 ‘면죄부’라고 후대 사람들이 비판하는 교황권, 성직 질서, 그리고 공로를 쌓아 최후심판을 면제받는다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옳은가 함께 토론하자는 것이었다.

루터는 ‘십자군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을 말하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틴 루터와 존 칼빈 등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정신이 “오직 은총만, 오직 믿음만, 오직 성경만!”이라는 3마디 모토로 압축되어 가면서 본래 선혈로 물든 예수의 ‘십자가’는 점점 교리화, 박제화(剝製化), 신학체계화 되어갔고, 생명력을 잃어갔다. ‘오직 은총만!’은 정의를 요청하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맘씨 좋은 하나님 신앙>으로 변질해 갔다. ‘오직 믿음만’은 실천하지 않는 <근본주의 5대 신앙 교리 수용>으로 대치되어 갔다. ‘오직 성경만!’의 신앙은 <성경문자 무오설 책종교>로 경직화되어갔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정신은 온갖 인본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치장들을 벗겨내고 ‘갈릴리 예수의 복음’ 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갈릴리와 유대나라 사회에서 죄인 취급받고 천민 취급받는 세리, 창녀, 가난한 날품팔이 노동자, 목동들, 농민들의 고통과 인간적 절망에 연대하고 격려하고 함께하셨다. “너희들은 참새구이로 팔려가는 그것들보다 존귀한 존재들”이라고 격려하였다(마 10:28-33).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 편에 선다고 비방받았지만 ‘저항적 동행자 예수’는 그의 신념을 포기하거나 세상 악과 타협하지 않고 초지일관 걸어나아가심의 대가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사 53:5).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너무 번잡하고도 현학적인 신학이론을 다 털어내고 보면 “예수를 닮아가면서 살자! 예수님 같이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 길과 진리와 영생이 있다!”라고 확신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 알짬이요 정통신앙이다. 그렇게 볼 때, 2024년 10월 10일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한국의 소설가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의미와 한강이라는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진실이 다름 아닌 예수정신임을 깨닫게 된다.

소설가 한강이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살려주고 우리 한글과 한글로 쓴 작품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진실로 놀라운 경사요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한강의 작품이 증언하려는 더 깊은 뜻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한국도 1등 문학상 받았다고 자만할 일이 아니다.

문학평론가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점은 한강의 작품은 ‘거대담론’ 이야기도 아니고, 특정 정치적 이념을 편들어 주장하는 ‘정치이념 소설’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 모두가 예외 없이 휩쓸려 들어가 있는 어처구니없는 전쟁광란, 집단폭력, 진영논리, 인간존엄성을 스스로 움츠리게 하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현실 속에서, 고통당하는 동료 인간들과 더 나아가서 생명 있는 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고,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고통을 줄여보려는 실천적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곳에 인간의 존엄성과 구원의 빛이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한국 현대사 80년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좌우 이념 차이의 갈등과 무자비한 살육, 4.19와 5.16혁명, 신군부 정치군인들의 광주시민과 학생들 학살, 세월호 침몰 사건과 이태원 집단 압사 사건, 남북 양쪽 호전주의자들의 ‘강대강’ 무력시위와 국민 겁박...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역사적 트라우마’는 언급하거나 건드리지 않고 그냥 조금씩 잊히기를 기다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번 한강의 노벨수상작 작품들은 나와 같은 소시민들의 현실도피적이고 지금도 계속되는 인간집단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심리적 유혹은 인간됨을 포기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단순한 유혹임을 넘어서 인간성 포기요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투쟁하는 용감한 전사(戰士)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모두 사팔뜨기 눈들로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고통 속에 있는 인간과 생명 있는 것들과의 교감과 연대를 결코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주었다.

깨어있는 문학 작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국신학은 무엇을 말하고 관심하고 있는가? 새 시대를 준비해도 부족한 이 시기에 진화론과 창조과학회 간에 논쟁을 일삼고, 숭미주의와 반공주의에 깊이 영혼들이 병들어 4.3 제주사태와 5.18 민주항쟁을 북한군이나 북한당국의 개입이라고 폄훼하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의 인격을 연속 살해하고, 한강의 작품과 심지어 노벨상 선정위원들의 역사 인식이 역사 날조와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라지들과 독충들의 주된 모판’이 극우적 기독교라는 세간의 의심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고 공분과 비탄을 금할 수 없다.

요즘 교계지도자들에게는 격감하는 개신교 각 교단들의 교인 숫자 감소에 대한 걱정이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그 염려의 근본 동기가 한창 교세가 왕성하여 잘 나가던 기독교라는 종교의 호시절(好時節)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노스탤지어라면 한강의 문학정신과 비교할 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나와 한국 신학의 부끄러움을 일깨워준 작가 한강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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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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