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칭의 이론이 있는데요. 그러나 성경에선 이를 부정하는 듯 한 구절도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형제를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구절도 복음서에서 나옵니다. 또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도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옥에 가두라고 준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A.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다음과 같은 외침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지적한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즉 수많은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을 알기 원하지 않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샤머니즘과 같은 무속종교와 같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많이 지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권면하면서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경험하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도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고 하는 구원의 획일화된 패러다임이 오히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을 건너 띄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진실한 회개가 뒷받침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리만을 붙들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야고보서의 아래와 같은 말씀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0-22)
이 말씀은 믿음과 은혜만을 강조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머리통을 내려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들은 교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적 믿음을 가졌기에 그 사람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성경적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적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적인 믿음을 넘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이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에 이르게 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미래에 원하는 것이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긍정의 심리학에 불과하며 자기만족을 위한 동기부여일 뿐입니다.
믿음은 항상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서 주를 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1) 스데반 집사는 순교의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주를 바라보았기에 두려움이 잡히지 않고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행 7:55)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믿음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항상 현재형입니다. 이 성경적 믿음은 매 삶 속에서 당연히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주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이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 6:46) 그들은 입술로만 주님을 고백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입술로만 공경하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주님은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면 그는 선한 것을 말할 것이며 선한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는 악한 말과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실이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있지 않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보면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무려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즉 영원히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고 몹시 미워하며 학대하는 모습에 주인은 그 종을 다시 빚을 다 갚으라 하고 옥에 가둡니다. 여기서 주인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 18:33)
일만 달란트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신 주인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너는 마음에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는데, 저도 주님과 같이 용서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믿음이라는 것인데, 지금 그 종은 지금 행함이 없는 죽음 믿음, 지적인 믿음에 머물고 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믿음으로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늘 아버지께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입술로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마음으로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 감사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성경적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주를 향한 믿음이지, 지식으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경적 믿음은 항상 주님을 마음으로 모시고 살면서 삶과 행위에 반드시 성경적 변화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참 믿음으로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분을 제일로 사랑하고 동행하면서 말과 행실에서 주님의 모습만 나오는 참 믿음의 사람 될 수 있도록 경건생활에 힘쓰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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