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는 과거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를 비롯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의 역사들을 다루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보지 않아도 대충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선악과 질투, 배신 그리고 사랑과 자비에 대한 극적 결말들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주제는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서에는 훌륭한 왕들과 패역한 왕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그 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입니다. 왕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백성들의 행복과 축복이 있었으며, 반대로 하나님께 불충한 왕들이 저주를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나라의 안위와 평안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태도가 중요한 축복의 기준임을 깨닫습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했던 솔로몬 왕 때로부터 4세기 후 유다가 바벨론에 정복당할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나라와 성전을 왜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왕으로 임명되는 것부터 아합의 아들 아사와 여호사밧의 통치까지의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통치가 아들 솔로몬에게 이어지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라는 부강해졌습니다(왕상 1-4장, 9:15-28). 솔로몬은 왕이 되자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성전 건축의 거룩한 임무를 완수했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오래전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왕상 5-10장). 이 거대한 건축물은 이전에 본 적도 없는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갈망의 완성이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드린 헌신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무조건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과 그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이방신에게 돌아서면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끊어지게 되었으며, 솔로몬조차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왕상 9:1-19). 솔로몬의 권력과 부유함이 커질수록 이방 종교와 방종한 삶으로 천천히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많은 이방 아내들이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지 못한 솔로몬의 태도는 그의 뒤를 이은 많은 다음 세대들을 오염시켰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대들을 위해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한 나라가 어떻게 우상을 섬길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상으로부터 확실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상숭배와 악함은 쾌락과 즐거움으로 우리를 부드럽게 유혹하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들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실천하고 유지하는데 대가가 크지만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이를 ‘거룩한 낭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배자는 생명을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6)은 ‘작용과 반작용’ 이론을 확립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입니다. 이 법칙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분열 시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세우셨을 때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든 나쁘든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에는 결국 그에 맞는 결과들이 따라왔으며, 열왕기하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열왕기하는 이스라엘 아합의 죽음(BC 850)에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으로 인해 파멸(BC 587)될 때까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입니다. 열왕기상과 같이 불신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스러웠던 위대한 선지자들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예배의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며 영적으로 더 신실하기도 했지만 불가피한 심판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왕하 24:1-4).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선지자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왕하 17:7-23).
솔로몬의 죽음 이후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의 계보인 유다 지파로부터 이탈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자신들만의 왕을 세웠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았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했습니다(왕상 15:26). 이스라엘 왕들은 이방 신들을 좇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된 징계를 받았으며 결국 BC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비해 덜 타락했는데, 히스기야(왕하 18-20장)와 요시야(왕하 22:1-23:30)를 비롯한 일부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께 불충했으며 결국 BC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친 이 최후와 함께 열왕기서는 암울한 끝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심으로 예배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축복과 번영을 잃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교인들에게 열왕기하와 같은 사람들로 여겨질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도록 지음 받은 예배자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열왕기서는 우리에게 영적 간음의 무시무시한 결과를 경고해줍니다. 우리 역시 바알과 같은 세속 문화의 신들에 쉽게 유혹됩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율법서 말씀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높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며 축복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왕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애쓰는 선지자들도 보여줍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돌아오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외, 순종으로 우리를 절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예배 해야만 합니다.
좋은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역대기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이야기를 다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신실함이나 선지자의 증언 또는 업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유다 왕국을 깊게 이야기하며, 특히 번성하고 쇠퇴하고 사라지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 예배에 집중합니다. 역대기는 사무엘과 열왕기와 다른 오래된 자료를 통해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왜 그들이 지배받는 민족이 되었는지, 어떻게 미래에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 안에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역대상의 처음 부분은 기나긴 이스라엘의 족보를 설명하는데.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계보와 역사가 느껴집니다(대상 1-9장). 아담으로 시작해 다윗의 통치시대 제사장과 지도자들까지 계속된 가족 계보의 목록과 이름으로 시작되며,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백성의 믿음과 예배를 크게 변화시켰던 다윗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언약궤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본래의 장막에 위치했으며, 제사장들은 법궤 앞에서 노래와 악기로 찬양하며 예배하도록 정해졌습니다. 또한 다윗은 미래의 성전 부지에 사용될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가져왔으며, 여호와를 위한 예배에 여러 임무들을 부여하기 위해 레위 지파의 제사장과 음악가들을 준비했습니다.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군사적 성취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을 보이고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예배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대상 13장부터 29장과 역대하 3장부터 7장까지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성전의 봉헌에서 극대화되었는데, 성전은 두 번이나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대하 5:13-14, 7:1-3). 봉헌 기도에서 솔로몬은 이 땅의 어떠한 구조물도 감히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대하 6:18). 한편 다윗은 마지막 연설에서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기금을 내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헌신할 지도자들을 촉구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하나님께 감명 깊은 고백과 찬양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신약성경에 나온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들과 유사합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여러분은 공공기관이나 오래된 회사에 벽면에 걸린 이전 지도자의 초상화를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벽에 걸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얼음처럼 굳어 있습니다. 그림 아래 명판에는 보통 이름과 임무 기간이 명시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어쩌면 기관을 어렵게 했거나 압박을 받아 사임을 해야 했던 나쁜 관리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초상화는 더 성공하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그려져서 벽면 한쪽에 걸려있습니다.
역대하는 벽면 한쪽에 걸려있는 유다 왕들의 초상화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역대하는 솔로몬의 통치기간을 묘사한 후 유다를 다스린 이십 명의 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완전히 실패했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와는 달리 역대하는 왕들의 단점에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마치 아주 좋은 초상화처럼, 역대하는 나쁜 지도자라 할지라도 가장 좋은 모습만 보여줍니다. 심지어 우상숭배, 사술, 요술, 이방신 바알 제단을 쌓았던 므낫세 조차도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았을 때 회개했음을 보여줍니다(대하 33:13).
역대기에 나타난 성전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성전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을 가득 채웠듯이 예수님께서도 유일한 방법으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제사장들이 백성을 대신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듯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신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히 4:14, 9:24-25). 성전에서의 제사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를 상징하듯, 단번에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를 완전히 하나님과 화해시키십니다(히 9:26).
역대하는 유다의 예배 개혁을 극찬했습니다. 르호보암이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했으며, 아사가 백성들을 언약으로 다시 인도했으며, 여호사밧이 제사장 찬양대원을 군대 앞에 보냄으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또한 요아스와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아가 성전을 보수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예배는 성전 건물이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이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진정한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습니다.
역대기는 비록 악이 유다를 지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명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돌아가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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