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0.02.12.
설교자: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
기독교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사죄의 은총입니다. 이 사죄의 은총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예수 그 이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내가 영광스럽고 복되며 아름답고 귀할 때가 아니라, 내가 나의 죄를 그대로 지고 갈 때입니다. 주님은 거기까지 찾아내려 오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대신 지어주시고 다 사해주신 주께서 ‘내가 행한 이 일을 너는 믿기만 하라’고 하시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믿음은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처럼 낮은 곳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신 주님. 그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이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인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내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께서는 내 모든 죄를 ‘죄 없다.’ 선언해주셨습니다. 아무도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을 때, 주님만은 나를 받아주셨습니다.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입니다.
놀라운 은총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유혹하는 사탄의 음성에 마음을 빼앗긴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생애를 복되게 인도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나 홀로 서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분은 나를 향해서 이런 죄를 지적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2:13-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2:19-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가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나 홀로 스스로 목을 곧추세우고 살려는 성질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 때 내 속에 거짓과 불의, 간음, 잔인함, 미움이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증상들이 다양한 죄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한번 죄를 지으면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Fact입니다. 그 어떤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는 실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멍에를 메고서 죄가 주는 형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죄를 지었을 때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죄의 은총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1:9-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사해주시는 주의 은총을 우리들은 날마다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내 죄가 용서받을 때 우리는 죄를 범했던 전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성경은 말해줍니다.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축복을 허랑방탕하게 소진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서야 그는 죽게 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우리 집엔 모든 것이 풍성한데 난 아무것도 없도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그분 앞에 용납되기 힘드니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러면 혹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해주실지 모른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집으로 가는 길,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가 그 유명한 부잣집 아들인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입었던 옷은 너무 헤어져서 남루해질 대로 남루해졌고, 고통 속에서 그의 몰골은 한없이 변하여 이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들이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이날도 아침 일찍 나가서 마을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독수리의 눈보다 더 밝은 눈으로 살펴봅니다.
한 젊은이가 옵니다. 그의 사랑의 눈은 초라한 몰골과 누더기가 된 옷을 꿰뚫고 들어가 사랑하는 아들을 봅니다. 벌떡 일어납니다. 힘차게 뛰어갑니다. 쫒아가서 누더기를 걸친 젊은이를 덥석 껴안습니다. 땟자국으로 도무지 형체를 상상할 수 없는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큰소리로 외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이로써 내가 즐거워하는구나!’
내가 죄를 짓지 않았을 때보다 더 깊이 아버지와 만나지는 축복.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사죄의 은총입니다. 기독교 성자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참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회록을 쓰는 사람’이라고 톨스토이(L.N.Tolstoy)는 말했습니다. 사죄의 은총은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다가 '종'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최대의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 이런 은혜가 내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 가장 많이 드려지는 예수 기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가톨릭의 미사에서는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이 회개의 간구가 우리의 잘못도, 범죄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더 깊이 만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 7: 14-
하나님은 민족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축복을 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1885년 부활절, 선교사의 첫 도래로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되었고,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양육을 받다가 사죄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로부터 시작된 평양 대부흥운동입니다. 길선주 장로가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사람이 간음과 거짓말, 사기를 쳤음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고 울부짖으며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국가는 존망지추며, 온 세계에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는 이 민족이 한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며,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단하고 힘든 그때에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비참한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깊은 고통의 시간이었으나 사실 우리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더 이상 우리나라가 독립할 기력이 없고, 한 세대가 지나갔기에 되돌릴 수 없는 일본이 되었다고 모두가 포기했을 때에도 주기철, 최권능,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것’이라며 신앙을 뺏어가려던 일제에 1937년부터 신사참배 반대운동이라는 거대한 저항운동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들으시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해방되었을 때에 우리나라가 망했다고 울었던 사람도 그렇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해방을 주셨고, 1948년 선거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대한민국이라는 국체를 우리가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시작하며 우왕좌왕할 때, 치밀하게 남침을 준비한 김일성과 소비에트 연맹의 원조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망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절망적인 의견이 나올 때 목회자들은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애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해방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죄를 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UN에서 처음으로 의결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했고,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고 바른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19가 났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던 때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갔기에 참된 자유가 오는 줄 알고 쾌재를 불렀지만, 곧 군사혁명이 나서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자유를 남용하여 곳곳에 문제가 많던 그 나라를 바로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한 군부 출신의 정부는 오히려 철저히 우리의 자유를 짓밟았습니다. 유신헌법이 통과될 때 우리나라는 남미처럼, 아프리카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에게서 영원히 떠나서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절망의 탄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박 대통령이 시해당하자 제5공화국이 시작되어 자유민주주의는 또다시 말살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에 더 힘든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맞이합니다.
1987년, 6월 미국 메릴랜드의 한 대학에서 유학생 250여 명이 모여 수련회를 개최했습니다. 본국의 후배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분신자살했다는 소식, 박종철이라는 학우가 고문당해 죽었다는 소식에 청년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귀국하여 젊은 목사들과 함께 이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다고 행동하던 때 ‘6.29 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져서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김영삼 정부가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한 것은 기껏해야 30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2~3-
백성이 여호와를 떠났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가장 큰 축복은 사죄의 은총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죄의 은총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까지 선거는 좋은 사람과 정책을 가진 정당을 뽑는 것이었다면, 이번 4.15일 선거는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인 것이 더 분명해져 가고 있습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께서 취임하시면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모두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 6일, 이인영 민주당 원내총무가 선거 이후의 포부를 말하면서 제시한 것들은 다 사회주의 정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악전고투하면서 여기까지 발전시켜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 한 나라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T.More)가 지은 ‘유토피아’에서 그 나라를 설명했고, 조지 오웰(G.Orwell)이 소설 ‘1984’에서 빅브라더를 등장시켜 한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여 개인은 숨조차 쉴 수 없는 전체주의 국가를 설명했습니다.
앞으로는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 공산주의 전체주의 국가도 이룩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나라가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 선거를 치러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우리나라는 망국의 조짐이 보였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바른길로 인도해달라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철저히 자백하고 회개하여 개인적으로도 용서 받음이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주어진 특권과 부유함에 젖어 우리의 탐욕의 만족 대상으로 목회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하나님께 용납받아 역대하 7:14절 말씀처럼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실 뿐 아니라 이 땅을 고쳐주시는 축복이 있기를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우신 그 하나님께 이 민족의 장래를 부탁하고 우리 후손의 시대를 바로 준비하는 복된 기도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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