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두 눈이 있다고 해서 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눈 뜬 소경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글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에게 책을 갖다주면 하면 종이와 활자는 보지만 의미는 모르니 보나 마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악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악보를 주며 노래를 부르라 해도 악보는 보아도 노래는 나올 수 없으니 눈뜬 소경이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먼 하늘의 성좌와 무궁한 공간의 천체를 보지 못하고 아무리 가까워도 공간과 물체 속에 꽉 차 있는 미생물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먼 미래를 보지 못 할 뿐 아니라 다음 순간에 될 일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다.
먼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가까이 마주 대하고 대화를 하고 사귀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기에 사람의 가슴속 머릿속은 들어가 볼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에 보면 햄릿의 비밀을 캐러 온 두 사람에게 그는 피리를 내밀며 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 길레스탄은 “저는 불 줄을 모릅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소리를 못 냅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햄릿은 격한 어조로 “그럼 너는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너는 내게 여러 가지 소리를 불게 하라고 하는데 마치 내 악보를 아는 체 하고 내 마음의 비밀을 다 캐내려고 최저음으로 최고음까지 불게 하려고 하지 않느냐. 보라. 이 작은 피리 속에 온갖 아름다운 음색 묘한 소리가 꽉 차 있다. 이것조차 불지 못하는 주제에 이 작자야, 나를 피리보다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알아보았느냐? 멋대로 사람을 악기 취급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나를 노하게는 할 수 있어도 내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오늘날 글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고 악보를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사람 못 보는 소경은 많을 것이다.
하물며 정신의 세계 영계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은 얼마나 많을까?
주님은 스스로 잘났다고 하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바리새인을 눈뜬 소경이라고 책망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눈먼 맹인은 인간들이고 바로 우리들 아닐까?
사람을 보면서 사람을 모르고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모르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도 진리를 모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제자들은 눈먼 맹인의 눈을 뜨게는 못 하면서 그 이유를 캐묻고 아는 체 하고 이론을 따지기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종교, 철학, 윤리, 예술, 과학 정치, 경제가 인생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암중모색하면서 마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할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행렬은 역사에서도 현대에 또한 미래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원인이 자기 아비의 죄인가? 자기의 죄 인가를 따지고 묻기에 바쁘다.
그것이 제자들의 질문이었다. 이 소경이 나면서 눈먼 것이 자기 아비의 죄 때문입니까? 혹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입니까?
스탠리 존스 박사는 인간은 고통과 불행의 책임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 유전, 둘째 환경, 셋째 운명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당하는 환경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돌리는 것이 첫째 경우이고 사회와 환경의 탓이라면서 이웃과 사회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둘째이고 셋째는 알지 못하는 운명의 탓이라면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과 이브의 후예로 그럴듯한 핑계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소경들의 공론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문제 불행과 불행의 문제를 조상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남의 탓으로 하지 말라 현재의 자기 탓이라고 한탄하지도 말라.
내일도 일반이라고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창조의 능력 사랑의 섭리, 구속의 은총, 재창조의 역사가 그에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바로 나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바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생은 눈먼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니 그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예배하게 되었다.
예수를 보게 되므로 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보게 되고 세상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자기 눈을 띄워 보게 해 준 예수를 보게 됨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무식한 소년도 보면서 믿게 된 예수를 꼭 같이 만나고 보면서 왜 유식하고 경건한 바리새인은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되었나? 그들은 겉만 보고 속은 못 보고 소리만 듣고 의미는 모르고 형태만 보고 가치는 모르는 자들이다.
그릇된 선입견으로 하나님도 세상도 사람도 그릇 보고 있었다.
병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안식일에 일했으니 예수가 곧 죄인이라는 것이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잘 아니까 믿지만 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모르니까 못 믿겠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을 잘못 알아 참 진리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내 눈을 뜨게 한 분이 사실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한데 왜 믿지 못하느냐는 소경의 증거를 듣고 네가 죄인으로 우리를
가르칠 작정이냐고 책망을 한다.
자기가 의인이라는 선입 주관 때문에 타인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
바른 증거를 듣는 귀가 가리워 지고 말았다.
안식일과 율법과 자기가 우상이 되어 눈을 가리워 져서 예수님도 사람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본다는 말은 의미를 알고 가치를 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구라파 상인들은 아프리카 소녀들이 공기돌을 갖고 노는 아이를 조그만 거울 하나씩에 막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의 생의 의의를 모르면 사람이 동물도 되고 기계도 되고 물질도 되고 악마도 된다.
마구 값없이 인생을 처분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상속권을 팔았던 에서처럼 자기를 팔아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버리고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그 반대로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우상화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그것을 믿게도 된다.
부귀와 권세와 향락으로 썩어질 피조물의 종노릇을 하면서 묘지까지 걸어가게 된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 부분을 전부라고 우기며 다투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부각 된 인간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고 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인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 택한 백성, 거룩한 나라가 된 인간의 존엄을 보게 된다.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 생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주께서 보시는 눈으로 이웃과 사회를 보게 될 때 사랑의 빛 아래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된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 세리와 창기, 탕자와 죄수, 강도와 원수까지 구속의 대상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빛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내가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다고 사도 요한은 땅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환란과 핍박이 있는데 밧모섬 이란 무인도에서 새 세계의 비전을 보게 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맹인처럼 살던 신도들은 그리스도가 전 우주를 통치하는 영원무궁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원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 “네가 본다 하나 실상은 눈이 멀었다” 하시고 스스로 다 아는 체 하는 바리새인에게 “차라리 보지 못하는 자인 줄 알았더라면 죄가 없을 뻔하였다”고 하셨다.
본다고 하니 아직 죄인이라고 하신다. 소경 된 사람은 구원하고 의인인 척하는 자들은 책망하신다.
나면서 눈먼 소경은 보게 되나 스스로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은 소경이 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구원받는 자는 보고 심판받는 자는 보지 못한다.
보는 자는 구원받은 자요. 보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이다. 우리 눈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은 헬렌 켈러의 기도이다.
그가 쓴 글에 “내가 만일 사흘만이라도 눈을 떠서 보게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하루는 하늘에 해와 달과 그 뭇 별들을 보고, 땅에 피는 온갖 화초와 새소리 개울 물소리를 듣고만 알고 느낌으로만 알고 만져만 보던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볼 것이요, 둘째 날은 뉴욕 박물관을 찾아 인류 역사상 인류가 남겨 놓은 모든 유물들과 그 유명한 모든 미술품들을 구경하겠고, 셋째 날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손으로 악수만 해오던 모든 친구들의 얼굴을 친히 볼 것이다.”
사흘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이 눈을 아니 일 년 아니 평생을 뜨고 볼 수 있는 분들은 아무 감각이 없을지 모르나, 나면서 소경 된 사람으로는 그 눈으로 보는 것이 실로 일각을 천금보다 더 귀하게 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주님과 세상과 이웃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게 하옵소서.
시간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영원을 보며 소원했던 헬렌 켈러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른다.
주여 보게 하옵소서. 새해의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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