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한 분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1:18절 에서는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확인해 주고 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 이라는 점과 또 그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하나님과 한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17:21) 역시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성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임재를 말할 때 임재라는 말을 썼다.
구약 성서에서 “영광”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연관되어 있다(출24:15-16, 40:34). 성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임재이다. 회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회막 안에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임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광의 또 다른 요소는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이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출현에 따른다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영광의 개념은 근본적인 변화를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인식 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전통적인 사상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과 같은 어떤 종교적 성전이나 지역에 나타내고 계신다는 사상이나 신앙이 변천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그의 거처, 그의 영광의 거처를 그의 외아들인 예수라는 인격에 두 신 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한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데 예수가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 인간들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최고 형태의 계시이기도 하지만 영광이기 도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몸으로 나타낸 분 또는 하나님의 영광의 화신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취지이다. 보통 우리가 영광이란 말을 할 때 햇빛과 같이 찬란한 광채를 수반하는 어떤 초월적인 황홀경과 같은 상태나 화려한 모습이나 광경 같은 것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적인 영광과 같지 않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 내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의 탄생과 삶, 말씀과 교훈과, 치유, 또한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과 승천 등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 한다는 말이다.
그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낮은 삶을 사셨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그들을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임을 나타 내셨다.
또 그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이제 저를 영광스럽게 하여 주옵소서.”(요17:5)
여기서 “영광스럽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상에서 수난과 죽임 당하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 이다.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나타 내신 하나님의 영광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약한 어린아이로 태어 나셨다. 그의 부모의 사회적 신분은 비천한 계층에 속하였고 세상 적으로 말하면 천민 계층의 아들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인간으로서 태어 날 수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다.
그는 억압하고 누르는 통치자로 오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으며 충성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고 오히려 종의 신분의 모습을 취하셨고 인간을 섬기는 삶을 사셨다. 이러한 예수님에게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영광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늠름한 풍채나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으셨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증거 한다.
이것은 세상이 알고 있던 영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영광은, 섬기는 자의 영광이며 종의 영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리석은 사람 약한 자 무력한 자 멸시 받는 존재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삶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가 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잘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의 영광을 구할 수는 없음을 다음과 같이 설 명 하고 있다.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다(고전 1:27-29). 이러한 기독교의 특징을 허무주의 철학자인 니체는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라고 비판 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약자의 종교라는 말은 부정적인 면으로만 볼 수 없는 진실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 하거나 부끄럽게 생각 하거나 감출일은 아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사셨던 대로 살도록 노력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할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그가 구한 영광은 무엇이었나? 이 세상에서 출세, 성공, 권력, 부귀, 영광, 호화로움의 영광은 아니었다. 사회적 지휘 명성 등이 주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다른 영광을 구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흔히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과 같은 찬란함과 눈부신 광채가 나는 존귀한 영광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이 속세를 떠난 저 높은 곳의 영광도 아니었다.
세속 한 가운데 이름 없고 힘없고 빽 없으며 그들을 구조적인 악과 제약을 풀어주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는 일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하여 잘 묘사한 글이 있다.
제임스 프랜시스 (james A francis)는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곧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위대한 분을 소개하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여기에 한 이름 없는 마을에서 한 아기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는 벽촌에서 성장 하였으며 그는 30세가 될 때 까지 목공소에서 일을 했으며, 30세가 되었을 때는 방랑 선생 이었다.
그는 책이라고는 한 권도 쓴 일이 없다.
학교에 다닌 일도 없으셨다.
그가 태어난 지역의 200마일 밖으로 여행해본 적도 없었으며 더구나 관직을 가진 적도 자신의 집을 소유한 적도 없었다.
그는 위대한 일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의 친구들은 다 도망갔고, 그 중의 하나는 그를 배신했다.
그는 원수들에게 넘겨졌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직 젊었을 때에 세상인심이 그를 등졌다.
그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그가 죽어 가는 동안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소유했던 그의 겉옷을 차지하기 위하여 그를 처형했던 이들은 그가 유일하게 소유 했던 그의 겉옷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름판을 벌렸다.
그가 죽었을 때에 동정심 많은 친구의 무덤에 매장 되었다.
2000년 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오늘날 그는 인류의 중심이 되었고 전진하는 행렬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 행진했던 모든 육군과, 해군 그리고 의사당에 의석을 차지했던 모든 국회의원들과 통치했던 지구상의 모든 왕들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이 분 만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하였다.
우리는 그를 믿고 따른다고 하고 신앙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추구하신 하나님의 그 영광을 추구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과연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라고 찬송 부를 수 있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다.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고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살았던 대로 살기를 힘쓰고 주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구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흔히 종교 화가들이 그리는 화려하고 찬란하며 눈부신 광 채나는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황홀한 것이 아니었다.
끝으로 아빌라의 성자 테레사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소개 한다.
주님! 당신에게 이르는 길이 좁은 길이라 부를 수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제게는 그 길이 좋은 길이 아니고 왕의 대로(king, highway)같이 보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넘어지는 자들을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당신에게 바치고 낮은 자의 길로 당신을 따를 때 한번 또는 여러 번 넘어 진다해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망 할 수 없습니다.
사닥다리의 제일 낮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꼭대기에 이른 사람이라고 봅니다.
테레사 여사의 고백이다. 곧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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