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교회는 24명의 남성들이 그 안에서 순교 당한 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다. 그곳은 일제가 우리 땅에 남긴 가슴 아픈 상흔 중 한 곳으로, 기독교 유적지 중 손꼽히는 현장이다. 근처에 가보니 화성시 박물관으로 멋지게 잘 개장되어 있는 건물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부를 둘러보니 화성시 전체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전시해놓은 곳이었다. 화성이 독립운동을 아주 활발하게 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찾는 제암리 교회에 관해선 설명도 없이 달랑 한 장의 사진만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게 우리가 찾아온 유일한 관심사인데… 아쉬움이 커서 안내부스에 가서 물어보니 전문 안내원이 자기도 그 역사에 대해선 정확하게 잘 모르고 자료도 별로 없다고 했다. 정말 아쉽고 또 아쉬웠다. 그래서 현장 가까이로 갔다.
먼저 정부 보조로 지은 ‘제암교회’를 들렀다.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념해서 국가에서 지어준 교회이다. 잘 지어놓긴 했으나, 제암리 교회의 학살사건에 관한 자료나 설명은 전무했다. 누구 덕에 지어진 교회인데 말이다. 역시 아쉬움에 교회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무덤으로 갔다. 당시 교회 안에서 죽은 마을 사람들의 유골들이 합장되어 있는 큰 무덤이었다.
비석을 보니 순교한 모두 성이 ‘안’(安) 씨들이었다. 그 바로 밑에 지금도 안씨 후손들이 살고 있는 기와집들이 있었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은 1919년 4월 15일, 일본 헌병들이 자기네 대장이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에 대한 분노로 15세 이상 되는 마을 남자들을 교회 안에 호출한 상태에서 못으로 문을 폐쇄해서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총으로 난사해서 23명 모두를 학살한 사건이다.
생각만해도 끔찍스러운 야만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갓 결혼한 남편을 잃고 혼자 남아 평생을 힘겹게 살아온 젊은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교회 권사로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지막 생존자인 그 할머니의 사진은 제암교회 입구 플랭카드에 남아 있었다. 그 학살 사건 이후 남은 유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솟구쳤다.
무덤을 나와서 제암교회 윗쪽의 흰색 건물로 다가갔다. 거기가 실제 학살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라고 했다. 그게 실제 현장이 맞다면 거기에 자료들을 전시해놓고 설명하는 박물관이 들어섰어야 하거늘 그 교회가 소속된 감리회는 무얼했는지, 사진 한 장 찾아볼 수 없이 ‘정신교육관’ 건물이 들어서 있는 현장만 보고 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큰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순교도 귀하거늘, 23명이나 되는 순교자가 난 현장이 저렇게 무의미하게 방치되고 있으니 크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쉬움에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에서 제암리 교회를 탐색했다. 당시 현장에서 나온 유골과 유골 앞에서 흐느끼는 유족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나왔다. 생각했던 만큼의 자료는 없지만, 그래도 원하는 사진 몇 장은 구할 수 있으니 큰 위안이 된 것 같다. 어느 때보다 애국심이 절실한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나라 없이는 교회도 없고 나도 없다. 선조들이 피 흘려 희생 당하면서 세워온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확실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악한 외세 중국과 친하고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는 북한과 친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판사도 검사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경찰도 그 누구도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이들로만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이상적인 대한 사람의 기상을 높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국가 가사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조속히 현실화 되길 바라며 조용히 기도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