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화해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론, 즉 하나님의 의지와 창조계시의 뜻을 저버린 죄지은 인간을 그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보자의 역할을 한 것을 신학적으로 학문화 한 것을 말한다. 화해신학이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도록 죽기까지 화해시킨 사건을 신학화 한 것을 말 하는 것이다.

첫째, 화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화해에 대한 정확한 개념정립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화해는 어떤 사안에 대한 이해관계를 상호 긍정하도록 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고 화해란 정체성 상실에 의한 혼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물과 불, 또는 물과 기름같은 본질의 혼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와 투쟁이 있는데, 이 둘에 대한 화해로 평화개념에서 투쟁의 악한 성질 개념 요소도 받아들여 함께 그 본성이나 역할을 인정하는 그런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예로 들면, 정신과 물질의 화해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말씀 대로, 영은 영, 육은 육의 형질 그대로, 선은 선, 악은 악 그 본질이나 성질 그대로 존재 할 것이다. 즉, 선과 악의 혼합이나 섞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2원론(Dualism)으로 영원히 평행선을 유지할 것이다. 선과 악, 이 둘은 하나님의 역사통치 내에서의 신의 속성과 본질을 구분하게 하는 원초적 요소이므로 동과 서가 만날 수 없듯이 영원히 화합하게 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특히 플라톤의 2원론은 선과 악은 영원히 함께 존재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종말의 때에는 악은 심판받게 되고, 오로지 선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것에서 그 정체성을 혼합, 하나의 개념현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인간과 역사통치 내에서의 신의 속성과 본질을 구분하게 하는 근본적 요소로서 인간의지로 화해 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해란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여 어떤 사안에 조화를 이루어 평화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둘째, 그렇다면, 화해신학은 왜 강조되고 있는가? 우선, 하나님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라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18-19을 통해 사도 바울은 이를 화해신학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하여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죄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인간 자신의 능력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의지력 행사를 말한다. 성경의 고전적 죄의 정의 (Definition)는 아담의 불순종을 말하고 있고, 현대신학자들 중,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는 “인간이 신(하나님) 과 같이 되려는 것이 죄” 그리고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하나님과 멀어지려는 인간의 의지가 죄(Estrangement)”라 하였다. 거역, 항명, 배반, 배신에 의해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만들고 말았다. 결국,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에로 돌아 올 수 있게 하기 위한 매개체를 두셨다. 구약에서는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의식을 통해 하나님과 신앙적 관계구조를 만들어 갔으나, 이제는 자신을 비워 아들을 보내 그로 하여금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구속사적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화해를 위한 속죄물이 되었다. 죄인인 인간은 인간의 단 1%의 능력이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인간끼리도 화목할 수 없다.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화해자, 중보자(Mediator)가 되신 것이다. 화해의 능력 없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론 때문에 인간은 죄인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경의 궁극적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 역할론에 의해 죄지은 인간이 그 현상으로 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셋째로, 화해는 인간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뜻한다. 인간의 회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화해란, 또는 화해신학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화해란 그렇게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 관용과 사랑이 전제된다. 성경의 빌레몬서가 화해신학을 대표한다. 주인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는 회개하여 잘못을 빌고, 빌레몬은 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화해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화해신학의 유형론(Typology)이 된다 할 수 있다. 빌레몬서가 정경으로 채택된 것은 화해신학의 진수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의지면에서 화해 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셨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임으로 처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인간끼리도 화해할 수 있고, 화해를 통한 화목도 이룰 수 있다. 특히, 인간이 할 수 있는 화해는 동일한 가치면에서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화해는 믿음의 영역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화해신학은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긴급히 필요하다. 인간들은 선하거나 정의 같은 도덕적 가치면에서도 이해적 갈등을 경험한다. 즉, 견해의 차이, 이해의 차이 같은 것이다. 여러가지 예를 들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적대감들이나 갈등, 지식인과 비지식인 사이에서 오는 경멸이나 상호 무관심 같은 것들이다. 기독교 교회를 예로 들자면, 같은 기독교 교회임에도 어떤 가치에 대한 이해차이로 분열한다. 이해의 차이는 다양한 교단을 만든다. 한국만 하더라도 어느 교단은 100개 이상의 분파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면서 신학적 교류도 안 하고, 일치하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교리로 인해 상호 무시하거나 반목도 한다. 오히려 경쟁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경쟁은 교회성장의 요인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것에 관심쓰다 보니 실제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 미국이나 유럽에 가 보면, 루터교회는 교회 내에 루터의 사진이 벽의 한면을, 장로교회에는 큼지막한 칼빈의 사진이 걸려있다. 기독교 교회를 통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나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이간이나 간극을 꾀히고, 분리를 주장하고, 동과 서, 극과 극으로 밀어내는 일을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고, 양의 탈을 쓴 늑대로서 오히려 적그리스도다. 목회자들도 좌파 우파로 이념적으로 나누어 상호 비방하고 있다. 성경정신과 배치된 행동들을 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하고 있고, 화해자를 하나님 나라의 대사(Ambassador)라 말한다. 인간 사이에서의 분파나 갈등을 무마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여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 특히, 성직자들은 이런 화해신학을 기초로 하여 사회를 하나 되게 만들고, 화합하게 하여 일치를 이루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모형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은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때다.

교회도 그렇고, 정당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점점 극과 극으로 나뉘어 멀어지고 있다. 화해신학을 기독교 목회자들이 더 설교하고, 더 강조하고, 더 생활화 해야 한다. 분열이나 비방, 반목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하는 평범한 설교는 기독교 교회 본질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회가 어느 분야에서나 양극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러한 때, 하나님의 화해의 말씀을 강하게 전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6.25전쟁 이후 촤악의 비극적인 내전 상태 난국의 대한민국, 한국교회가 화해의 신학에 사명을 다할 때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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