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입니다. 이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 갇힌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갇힐 수 있는 각오로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빌레몬서에는 ‘갇혔다’라는 단어가 네 번 등장합니다(1, 9, 10, 13절).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도 ‘갇힌 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에게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3절)라고 인사합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고, 평강과 안전의 근거를 바꾸며, 인생의 성공 기준을 바꿉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습니다.
김창훈 – 바울로부터, 빌레몬에게
뮌처는 당대 여러 개혁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혁신과 사회의 혁신, 개인의 회심과 공동체의 회심을 나누지 않았다. 그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를 살았다. 종교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공공의 문제”였으며, 종교 문제는 정치 문제와 나뉠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선명한 정치신학이며, 그의 정치적 저항의 근거는 신앙과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역동성이 성령을 통해 조명되지 않을 경우, “성서주의”에 갇힐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서주의”는 또 다른 문자 권력과 엘리트주의로 변질될 수 있기에 위험하다. 그러므로 뮌처의 신학에서,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유일하고 고유한 준거가 아니다. 말씀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말씀은 그냥 박제된 문자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진리의 말씀을 배운다면, 우리는 불신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의 비밀이 깨어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한다.
토마스 뮌처 – 프라하 선언
초대 그리스도교는 모든 폭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전환기에 바뀌었다. 내외적인 적대자들을 향해 무력을 동원해 싸웠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에 가입하도록 다소나마 무력을 행사했다. 선교 활동은 십자군원정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졌고 또한 전쟁이 동반되었다. 말하자면 8세기 작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11세기에 처음으로 멀리 이동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득이하게 전쟁을 치렀다. 많은 전투의 참가자들은 옷 위에 십자가를 차고 다녔다. 때문에 십자군 참여자들과 십자군 기사단들에게 십자군원정이라는 명칭이 뒤따랐다. 십자군원정의 참여자들은 그들의 전쟁이 정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문 용어인 “성전”(heiliger Krieg)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용어는 19세기 되어 비로소 나왔고, 이슬람교도들 역시 그 용어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아들여 사용했다.
마르틴 융 –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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