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어리석은 부자, 헤롯가, 마술사 시몬, 바리새인, 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디오드레베 이들의 약점이 내게도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성경에 기록된 실패한 인생들과는 상관없다고,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는 의롭다고 생각해 왔는가? 그러나 그들의 실패한 삶을 거울로 삼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내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다.
방관하고 책임을 회피한 정치인 빌라도, 탐심으로 부요하게 된 어리석은 부자, 그 시대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헤롯가 사람들, 마술을 부려서라도 다른 삶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관심 중독자 시몬, 눈에 보이는 표적과 손에 잡히는 것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내 안에도 감춰져 있고, 나는 아마도 은밀한 방식으로 그런 죄악을 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저자 한주원 목사(남산교회)는 독자에게 자신의 약점과 완악함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예수님보다, 고난을 주는 빌라도를 닮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권력, 부, 명예의 편에만 서 있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손을 씻으면서 말한다. 나는 무죄, 너는 유죄.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빌라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 놓아줄 권한이 있다고 착각한다(요 19:10). 그는 알지 못했다. 이미 재판장으로서의 역할을 박탈당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총독 자리를 보전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들’을 싫어한다. 동시에 그들이 통치하는 세상이 불편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한 것보다 선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그들의 세상이 싫지 않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싫지만, 그 생활을 벗어나는 일은 더 싫은 것처럼 말이다. ‘헤롯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 삶의 틀이고 형식이다. 우리의 달음질은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고전 9:26) 아니 해야 한다. ‘헤롯들’도 그렇게 살았다. 종착지는 다를지라도, 우리를 많이 닮아있다. 그 삶이 우리의 삶과 겹쳐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에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드러내놓고 웃었다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속으로’, ‘몰래’,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을 왜 비웃었을까. 바리새인들의 세계관으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과 재물이 공동 1위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두 번째이기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비웃었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 날씨에 냉차를 파는 아저씨가 오면 반가웠다. 나를 현혹하는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냉차는 눈뿐 아니라, 혀도 만족을 시켰는데, 설탕 대신 들어간 사카린은 단맛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마시고 나면 배탈이 났다. 대장균에 감염되어서 화장실을 수차례 오갔던 기억이 난다. 이상한 것은, 아니 화가 나는 것은, 그럼에도 그 냉차가 가끔 생각난다는 사실이다. 다른 복음이 주는 묘한 쾌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가짜에 길들여졌다. 배가 아프고, 화장실에 들락거릴 것을 알면서도 불량식품인 다른 복음에 계속해서 마음이 간다.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 비록 아프고 힘들지라도 진짜를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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