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나를 위하여, 나를 바꾸기 위하여’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나를 바꾸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다는 목적이 분명하면 역사 비평 방법에서 도움이 되는 측면과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읽기는 다른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을 연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목적이나 방법은 다른 문헌을 읽고 연구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마땅합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본래 성격을 무시하고 성경의 본래 성격에 맞지 않는 방법을 활용하여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라는 기독교 경전의 본질을 왜곡하고 성경을 성경답게, 성경의 가치에 합당하게 읽지 못하게 됩니다.
이문장 – 나를 바꾸는 성경 읽기
성서는 인간의 삶을 여러 모양으로 특징지어 말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총이요, 선택이요, 소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언제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갖게 한다. 바르트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많은 신학적 암시를 받았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게 하듯 바르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근원적인 객관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했으며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사고(思考)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가 성서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 하느님의 계시(啓示) 즉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모든 신학적 논의를 하고자 했다.
박영배 – 순례길 노트
이처럼 구원을 받기 위한 사전적(事前的)인 행함(공로,공적)은 필요 없다.그러나 구원 이후의 사후적(事後的)인 행함(믿음의 징표)은 나타나야 한다.위에서 언급한 야고보서 말씀 역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믿음의 표현인 함(순종)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마태복음18장에는 만 달란트를 탕 감받은 이야기가 나온다.이렇게 큰 빚을‘은혜로’탕감받은 사람은,사후적으로‘마땅히’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만 달란트 탕감 받았던 은혜는 무효가 된다는 것(구원을 잃어버림)이다. 믿음과 행함의 속성을 알기 위해 원어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성경 원어에서‘믿음’으로 번역되는 에무나(히브리어,구약)와 피스티스(헬라어,신약)는, ‘신실함'(언약을 지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이 동일한 단어를 믿음으로도 번역하기도 하고,신실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예를 들어,다음 로마서에서의‘믿음’과,갈라디아서의‘충성’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인 피스티스를 각각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이귀재 – 틀을 깨고 보니 한눈에 보이는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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