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를 어떤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를 쓴다고 말한다(고전 1:2). 그리고 “교회”라는 말과 동격으로 등장하는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 곧 “성도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로 부름받은 이들의 모임인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낸다. 고린도전서 첫머리에서 바울이 말하는 교회(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고린도라는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을 지칭하지, 물리적인 건물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너무 강하게 밀어 붙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가 또한 은유적 차원에서 하나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정동현 – 건축자 바울: 공간, 시간, 의례
무엇이 됐든 비밀이 있으면 우리는 숨는다. 타인에게서 숨고 자신에게서 숨는다. 결국은 하나님을 피해 숨는다. 그렇게 숨을 때 우리는 빛 대신 어둠을 택한다. 삶 대신 죽음을 품는다. 타인과의 허물없는 관계 대신 외로움을 취한다. 그 모든 은신의 확실한 결과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단절되고,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며, 창조세계로부터 소외된다. 볼품없이 추해지다가 아주 비참하게 삶을 잃고 만다. 정의를 시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면 상처를 입기 쉽다. 우 리 쪽에는 정당한 정의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어떤 집단은 이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실감한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를 상대가 거부하거나 오해할 수도 있다. 시편에 보듯이 정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시행 가능하다. 하나님처럼 정의 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해야만 된다. 정의와 자비를 우리 모두의 일로 보아야만 할 수 있다.
데이비드 테일러 – 마음을 열고, 두려움 없이
구원은 절대로 혼자 받는 것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이 가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복음은 삶이다. 나 혼자서도 성령님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된다. 성령이 역사해 주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속한 ‘나’가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되고 그분의 형상을 닮게 된다. 그 천국, 그 기쁨을 누려야 한다. 경의 기적은 믿기지 않아야 하고 납득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걸 믿을 수 있게 인도하시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요 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너무 좋다. “믿어지다.” 부디 이 모세오경이라는 구약의 첫 발을 띠고 난 후부터는, 더이상 흔들림 없이 말씀의 반석 위에 든든하게 서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정학 - 모세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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