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이 십자가를 따라서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 주도적 인간’입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오직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땅에 두고 있습니까? 세상에 빠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육체 주도적 인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죽이지 않았으므로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속했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면서 스스로 하나님께 속했다고 속고 있습니까? 여전히 마음이 공중에 있는 그들을 ‘혼 주도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구별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란 내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외의 것을 빼내는 것입니다. 오직 그곳에 하나님만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의 올바른 위치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많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많습니다. 고난은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시작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황명환 – 마음 바로 알기
우리가 교리를 가르칠 때, 그리고 교리를 익힐 때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삶을 교회의 집단적 지혜를 통해 탐험하고 있는 것이지 단지 그것이 기록한 말이나 구전에 침전(沈澱)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메도디스트 교리 교육의 목적은 메도디스트의 정신사적 부흥이나 진보에 있지 않다. 우리의 빛나는 유산은 언제나 그보다 더 큰 목적, 즉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도디스트 교단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는 그 위대한 날을 위해, 즉 웨슬리의 유산이 마침내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의 영광 속으로 녹아 드는 날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테드 A. 캠벨 – 간추린 메도디스트 핵심 교리
신약 성경에 포함될 마지막 네 번째 복음서를 기록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 사도 요한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겸손한 제목과 복음서 마지막 절의 “아마도”라는 결론 문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요한이 독특하게 저자로서 보이는 겸손함에도 이것이 바로 요한이 이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와 친밀했다는 놀라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언어적 유사성을 살펴보자. 구조적으로 요한복음는 “표적의 책”과 “영광의 책” 또는 “승리의 책”으로 불리는 대체로 대등한 부분으로 대칭을 이루며 나뉘고, 이 두 부분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몸을 이룬다.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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