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입문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 시대에 소속된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둘 다 주신다. 성령의 세례와 관련된 신약성경의 일곱 구절은 모두, 부정과거형이거나 현재형 또는 미래형의 직설법으로 되어 있으며, 명령형으로 된 권면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과 관련된 이러한 구절들, 즉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다시 충만해졌는지를 묘사하는 구절들과 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계속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애석하게도 그것이 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존 스토트 – 성령 세례와 충만
누가복음 10장의 비유는 일반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의 긍휼 없음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반유대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와 율법 교사(그가 이 비유를 이해했을 때, 그는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모두 유대인이었다. 함축적으로, 이 비유는 누가복음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내러티브는 일반적으로 성전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 교사의 질문은 예수(와 청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위를 보거나 우리 자신을 향해 내면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 외면을 바라보도록 요구받는다. 누가복음 10장의 내러티브가 신학적인 관점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체현된 신학이다. 즉 우리는 다른 몸의 신체적 안녕을 위해 몸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종교적 헌신의 의미다.
에머슨 B. 파워리 – 현대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겸손은 은혜를 뿌리내리게 하는 유일한 토양이다. 겸손의 결핍은 온갖 단점과 실패를 충분히 설명해준다. 겸손은 여러 다른 것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한 그런 은혜나 미덕이 아니다. 겸손은 모든 것의 뿌리이다. 왜냐하면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보여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모든 일을 행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어떤 명령의 참된 성격이나 절대적인 필요성을 더욱 진실하게 통찰할수록 우리는 훨씬 더 쉽고 철저히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순종에 대한 부르심은 지금까지 너무나 적게 고려됐다. 왜냐하면 겸손의 참된 성격과 중요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겸손은 우리가 억지로 하나님께로 가져가거나 하나님이 무작정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다. 겸손은 단지 자신이 전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끼는 의식일 뿐이며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게 하나님이 전부인지를 깨달을 때 찾아온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전부가 되도록 모든 길을 열어드리게 된다.
앤드류 머레이 – 죽을만큼 겸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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