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8-1931년의 신약학 교과과정
1931년에 와서는 교과과정에 체계적으로 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요람의 교과과정표와 과목별 변동이 ‘신약총론’한 과목이 생긴 것이 외에는 변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교과과정 중에 변화라면 시간이 기존과목에서 1시간씩 증가된 과목이 6과목-공관복음, 요한복음, 에베소서, 목회서신, 종말론, 근세교회사-이고, 시간 줄어든 과목인 구원론 1과목이라는 정도이다.
별신학과는 졸업한 목사만을 방학 중 1개월간 교육하는 특수과정으로 목사 계속교육과정과 같다. 1931년 교육과정에서 가르친 신약학 과목은 고린도 전서 3시간이다.
신학연구과를 졸업한 목사 중에서 10인을 선택 매년 가을에 3개월(9-12월)씩 5년간 차비와 식비등 모든 경비를 보조하면서 훈련하는 특수과정이다. 엘리트 대학원과 같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종교교육과는 종전에 년 1개월씩 5년하던 것을 1930년부터는 년 1개월 반씩 3년제로 바꾸었고, 졸업생은 2-3년 과정만 이수했으나 학생수가 적어 1936년에 폐지되었다.
* 1학년과목-성경 개요, 디모데서신 등 시간은 과목당 2-3시간씩이다.
* 2학년과정-갈라디아서와 빌립보. 시간은 1학년과 거의 동일함.
* 3학년과정-고린도전서. 시간은 1학년과 유사함.
다음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1호 신약학 박사인 남궁혁 박사를 항목을 따로 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3) 한국인 제1호 미국 유학파 신약학 남궁혁 박사
(1) 남궁혁 박사의 생애
남궁혁 박사(이하에서는 남궁혁으로 칭한다)에게는 여러 가지 직함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닌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가서 정식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신학자이었으며, 한국인 최초의 해외 유학파로서 평양신학교 성서학 교수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되어 금식하다가 순교한 순교자였다.
남궁혁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882년 7월 1일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외조부인 임씨(任氏)는 승지(承旨)와 평양감사를 지낸 고위관리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용인으로 피난을 가서 세 살 때까지 거기에서 자랐다. 후에 외조부가 평양감사로 가게 되자, 그는 일곱 살까지 평양에서 지냈다. 1896년에는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인천세관과 목포세관에서 1901년까지 공직생활을 하였다.
남궁혁은 1916년 4월경에 광주 양림교회에서 동료인 이득주와 함께 장로로 임직하였다. 이듬해인 1917년에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에 장로이던 최흥종, 조상학 장로와 함께 신학교에서 동학을 하였다.
남궁혁은 1921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15회로 졸업하자마자, 다시 광주 양림교회에 제3대 담임목사(1921. 6. 29 ~ 1922. 4.)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 4월에 그는 선교사들의 거듭된 유학 권면에 따라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미국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남궁혁이 유학을 떠난 뒤에 한국에 남아 있던 부인 김함라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솔내교회 출신으로 양림교회에 출석하면서 수피아 여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후에 남대문교회의 여전도회를 창설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 남궁혁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귀국하여 1925년 10월 1일에 모교인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최초로 한국인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성서학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성서번역 사업, 성서 주석 발간, 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의 편집 등의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 남궁혁은 1927년에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약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남궁혁은 광주 양림교회 장로를 역임하다가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담임목사로 재직하였고, 후에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로서 평양신학교 교수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1932년)을 역임하는 등 초기 한국교회에 눈부신 역할을 감당한 분이었다.
남궁혁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서 1938년 9월 20일에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이름으로 당시 일제가 국민의례라고 호도하던 신사참배를 결연히 거부하였는데, 그 결과 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신학지남”의 편집 주간의 책임을 계속 감당하였다. 그러나 1940년 10월 25일자로 “신학지남”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1945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남궁혁은 조국에 귀국하였다. 그는 194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서울 남산에 개교할 무렵에, 박형룡으로부터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단호히 교장직분을 제안한 것을 거절하였다. 누구나 명예로운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적임자로 여긴 남궁혁이 스스로 신학교의 교장직분을 사양한 것은 너무나도 그의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던 것이다.
남궁혁은 신학교 교장직분 대신에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의 총무로 재직하게 되었으나, 곧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공산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되어 금식하다가 끝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가 그의 향년 69세인 1950년 8월 23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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