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협력의 시대

1) 1920-1927년의 신약학 교과과정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1920-1924년에 교수진은 한국인과 선교사가 함께 하는 시대가 되면서 학제도 5년제에서 3년제로 바뀌었고, 연중 공부도 봄과 가을 학기로 나누어서 총 7개월간 수학을 하였고, 한 학기에 7-8과목을 이수하였다. 1923년 신학교 요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쳤던 교육과정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교육과정의 내용들을 통해서 당시 신학교의 특징에 파악할 수 있다. 이 내용들은 크게 6개 항목으로 구성되어있고, 각 항목당 과목과 담당교수, 그리고 과목에 대한 과정 연수와 설명으로 되어 있다.

 

1923년은 교과과정을 분석해보면 성경 신학 602시간(39%), 이론신학 504시간(32.7%), 실천신학 336시간(21.8%), 교양과목(0.66%)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0년과 같이 성경 신학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교과과정은 교실수업은 1주에 18-19시간의 교과과정이 이루어진다. 그 외, 선택과목으로 성서 희랍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영어가 개설되고 학생들은 2개 이상 선택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했거나 혹은 다른 경로를 통해 위의 어학들에 숙련이 된 학생들에게는 2개 이상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영어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익혀 메이첸 박사(Dr.Machen)의 『초보자를 위한 신약 희랍어』나 데이비슨 박사(Dr. A. B. Davison)의 『히브리어 문법』같은 영어로 된 교과서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목들의 목적은 학생들이 신약과 구약성서를 원어로 읽을 수 있게 훈련하는 데 있다. 또한 2개의 영어 과목이 개설되는데, 하나는 스태커(Stalker)의 『예수의 생애』와 같은 영어로 된 특정과목들을 위한 기초실력을 키우기 위한 고급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고급과정을 이수할 수는 없지만 고급과정으로 실력을 향상시켜갈 것을 약속한 자들과 제 삼자의 독자과정을 적어도 마친 학생들을 위해 개설된다.

1925년에 신약(New Testament department) 과목은 라부열, 마로덕(馬路德, Luther O McCutchen, 매큐첸)이 담당교수이고 과정은 학생들이 신약성경과 그 내용과,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영적 진리를 연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충분히 습득하도록 함을 목표로 한다. 1학년은 공관복음 강의를 받게 되는데, 이는 세 복음서에 담긴 많은 것들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연대기와 지리 및 복음서 시대의 역사에 대해 비중을 둔다. 2학년은 요한복음 강의를 받는다. 사도행전과 사도시대의 연구에 더하여, 일곱 개의 바울서신과 계시록 또한 해석학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신약총론 과정에서는 신약 언어연구, 본문비평, 사본들, 성경역본, 교부 인용문, 비평의 원리 그리고 본문과 경전의 역사 등을 다룬다.

라부열 교장이 취임한(1925.10.30-1940)때부터 한국인 교수가 청빙, 남궁혁 박사(1925)신약교수로 청빙되었다. 라부열 교장은 3학년 3학기제 교육과정으로 개편했다.

한국인 최초의 신약학 교수는 1925년에 교수직을 시작한 남궁혁이었다. 남궁혁은 1882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현대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까지 65마일을 걸어와 열여섯 살 때 배재학당에서 수업한 후에 그곳에서 4년 동안 공부한 후, 세관 근무를 위해 목포로 갔다가 그곳에서 남장로교 선교부의 프레스톤(J. F. Preston)의사와 낙스(Robert Knox) 의사를 통해 그리스도께 인도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공직에 있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제15회로 졸업하였다. 그해 그는 제1회 조선 주일학교 연합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 후 전남 광주 양림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192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2년간 본과와 예과를 42세의 나이로 우등으로 수료했다. 남궁 혁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조선총대로 출석하였고, 미국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위치한 유니온신학교에서 2년간 더 신학을 연구한 후에 명예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D. D) 학위를 얻음으로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를 얻었다. 귀국한 후 1925년 본교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취임하였다. 남궁 혁은 신학교에서 성경 번역, 성경주석, 신학지남의 편집에 정열을 기울였고, 한국교회와 선교부 사이에 서서 중보자의 역할과 한국교회 지도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남궁혁은 1932년 9월 제2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교수로서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는 마포삼열(1919년) 이후로 처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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