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멕시코주에 산타페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오래전 그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요,도시에 있는 작은 뮤지엄들 중 한 곳에서 아주 인상적인 전시물을 보게 되었어요. 초창기 미대륙 정복 당시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었죠. 그다지 크지 않은 유리 상자 안에 인디언 원주민들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주저 앉아있고, 정복자들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채찍으로 위협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제복을 입고 채찍을 휘두르는 정복자들이 전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혹시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네, 놀랍게도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복음은 분명 강하고 두렵고 공포스럽게 각인되었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당시 그런 방식으로 전해졌던 것이 참 복음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전해지는 복음을 통해 그들이 참된 크리스천으로 변화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겠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찾고자 하는 진정한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이 시간 이사야서의 본문을 통해 두가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 없이 우리는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이사야는 남유다의 웃시야왕부터 히스기야왕 시대까지 활동했던 예언자였죠. 그 당시 강력한 힘을 가진 북쪽의 앗수르와 동쪽에서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는 신생 바벨론, 그리고 남쪽의 강대국 애굽 사이에 끼인 외세의 위협 속에서, 왕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어요. 지도층은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었고, 백성들 또한, 부정한 이익을 취하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심각한 죄악까지도 저지르고 있었죠. 이사야 선지자가 1장에서 39장까지 일관되게 경고한 것처럼,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은 더 이상 소망도, 기대도 없는 처참하고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실제로 약 100년에서 150년 후 남유다의 심판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죠. 왕들은 정복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아들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야 했죠. 적군에 포위된 예루살렘성 백성들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혔고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극한 상황에까지 내몰립니다. 이런 모습을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이렇게 탄식하죠. “여인들이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먹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길바닥에 엎드러졌고, 처녀들과 청년들이 칼에 죽었습니다. 젖먹이는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참혹한 상황 속에 소망이 있을까요?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비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두번째,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인 40장 말씀부터는 확연한 어조의 전환이 일어나죠. 준엄하고 날카롭던 심판의 경고가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로 바뀌어져 선포됩니다. 징계를 받고 포로로 끌려가 고통 당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해요.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노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고 친히 그 분의 팔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온 세계와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9절에서 선지자가 힘써 전할 이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자로 오시는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그가 전하시는 복음의 강력함, 어둠을 뚫고 빛으로 임하시는 완전한 회복, 완전한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10절에서 말한, ‘강한 자’로 임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설명이라기엔 쓰여진 의외의 단어들에 우리는 좀 당황스러워지죠. 좀 더 강력하고 투쟁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우리의 이 깊은 절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저는 이 질문의 답이 복음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의 삶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두운 곳으로 오셨어요.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가 그분의 팔을 벌려 품에 안으시고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온순히 인도하시죠. 주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마침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초라하고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이 일은 어쩌면 너무 온유하고 소극적이어서 과연 세상에 어떤 변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죠.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는 세상 어느 것 보다 강력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실체를 품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복음의 본질은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낮아짐으로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1절의 표현처럼 몹시 온유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하고 놀라운 변혁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자와, 버려진 사람들, 마치 여러분과 저 처럼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귀한 신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엄청난 반전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제가 그 증인입니다. 7년 전 저는 제 남편을 하나님 품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한지 3일만의 일이었어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 속에서, 저는 제 동굴 속으로 깊이 숨어들어 갔죠. 그 따뜻한 손을 더 이상 잡을 수 없겠구나… 내가 어떻게 했었으면 그가 살 수 있었을까… 그 사람 없이 나는 어떻게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나… 나 혼자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지… 상실과 자책과 두려움과 절망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냥 제 삶은 여기까지고, 세월이 저를 저 인생의 끝 어디쯤에 데려다 놀때까지 조용히 숨어있어야겠다 생각했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깊은 절망의 동굴 한 가운데에 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주저앉아 있는 저를 안아 일으키시고 위로하시고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그 때 주신 시편 40편의 말씀이 제겐 복음이었어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 이미 그렇게 하셨다는 아름답고 기쁜 소식이 저를 새롭게 살리셨어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품고 그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제 삶을 변화시켰고, 그래서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었죠.
우리는 왜 인생에서 많은 굴곡을 경험하게 되는 걸까요? 어쩌면 저뿐 아니라 흩어진 나그네가 되어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 또한, 날마다 넘어지며 실패하며 좌절속에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강한 자로 임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나아와, 그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이 시간 저는, 우리 주님의 참 복음이 우리 안에 새로운 회복을 일으키셨다는 아름다운 소식을 여러분께 전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 절망의 인생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회복을 ‘함께’ 나누며, ‘함께’ 삶을 변화시키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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