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가 108주년을 맞이하여, 본 교단의 총회 산하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약학 백서를 준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너무나도 쉬울 것 같은데도 현실적으로는 각 신학교의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안타깝다. 장로대학을 제외한 호신대, 한일장신대, 영남신대, 서울장신대, 부산장신대, 대전신대 등이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1959년까지의 역사에만 제한을 둔 총회 신약학 백서가 된 느낌이 강하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총회산하 미션스쿨(경안신학교, 계명대, 서울여대, 숭실대, 연세대, 주안신학교, 한남대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어려웠다. 특히 1960년 이후에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의 신약학 교과과정에 대해서는 너무나 제한된 지면 관계상 2023년 현재 정리한 자료를 부록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이 백서가 주목한 점은 초기에 장로회신학대학이 성경 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면서 신학교의 특성화를 살려 나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총회 산하 모든 신학대학이 예외 없이 모두 성경학원이나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성경 번역 사업과 반포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1. 성령의 시대

1) 여명

본 교단의 신약학 역사는 우리말 성경 번역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1882년 봄에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서 의주 청년들인 서상륜과 서경조의 도움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한 것이 서북방언으로 번역된 우리말 최초의 성경이다. 1882년 5월에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가 3000권이 발간되는데, 그 중에서 1000권은 서울말로 출간된다. 1884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출판되고, 이어서 1887년에 이르러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셩교젼셔』란 이름으로 5000부가 출판된다. 로스 번역 성경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이수정은 1885년 2월에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발행한다. 바로 이 쪽 복음을 1886년에 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할 때 일본으로부터 가져온다. 그러나 이미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된 성경이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은 세계선교 역사상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이렇게 초기 한국교회에서 제일 먼저 발간된 성경이 신약성경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 수업도 후에 교과과정 설명을 통하여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자연스럽게 신약학이 주류를 이루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1911년에 『셩경젼셔』가 발행되었는데, 이 성경은 철저하게 한자를 배격하고 순수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문화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특히 한글을 말살하려는 일본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유산을 『셩경젼셔』가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반포는 권서인의 몫이 크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은 당시 성서공회의 직원으로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성경(단권 성경과 소위 쪽 복음서)을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일종의 외판 행상을 벌이면서 성경을 판매한 매서인(賣書人)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무급 권서(無給勸書) 혹은 자급 권서(自給勸書)로서 활동을 하였는데, 1900년도 초엽부터 활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단지 서적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산간벽촌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복음 전도인들이었다.

권서 전도인들이 괴나리봇짐 메고 삼천리 금수강산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손쉬운 성경이 쪽 복음이고 신약전서였다. 권서인 대부분이 반포한 성경이 신약전서이다 보니 한국교회는 자연스럽게 신약성경을 읽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다음과 같이 사경회에서 신약성경을 강해하는 일도 주류를 이루었다.

2) 사경회

권서인들의 성경 반포는 사경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일로 확산되었다. 최초의 사경회는 1890년에 언더우드의 집에 7인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07년의 평양사경회 곧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는 1903년 원산사경회로부터 불길이 번져나 온 “한국판 오순절” 사건이다.

왕달모에 의하면, 1907년 평양사경회 이전인 1908년에 미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이 800여회의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50,000여명의 성도에게 성경을 가르친다., 이는 당시 신자들의 6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한국초기교회의 성도가 “책 중의 책이라 할 수 있는 성경”을 열심히 읽는 모습은 각종 성경공부에 열의를 보이게 하여 그 결과 각종 성경공부반이 자연스럽게 사경회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디의 보고서에 “사경(sa-kyung)”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 1904년이다. 사경(査經)은 ‘사실할 査’ 혹은 ‘조사할 査’자에 ‘경서 經’ 자가 붙어서 ‘성경의 사실을 조사한다.’는 뜻이다. 곧 한국초기교회에서 사경회는 성도가 모여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아주 중요한 모임이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성경공부 방식은 당시 한국초기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어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한국초기교회가 ‘축자영감설’을 가장 공감하였다는 사실로 간주할만하다. 곧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것이다.

한국초기교회는 1909년부터 1901년까지 ‘백만인 구령운동’을 펼쳐나간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일 년 내내 전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축호 전도를 위해 날 연보’를 바친다. 이러한 전도에 대한 정열과 관련하여, ‘모든 가정에 마가복음 한 권씩 갖게 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당시 <대영 성서공회>는 이 운동을 위해 마가복음을 ‘백 만권’을 인쇄하여, ‘70만권 이상’을 팔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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