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들은 말을 의논하건대(26),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2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28)”(대하 34:26~2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게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1. 선지자를 통한 말씀
위 역대하의 말씀은 여선지자 훌다가 선한 왕 요시야에게 보낸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이 본문 앞의 세 구절은 백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고 이 본문은 왕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질서를 중하게 여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왕과 백성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적인 전달 방식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선 그 누구도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거나 음성을 듣거나 영광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권능으로 옷을 입힌 대리인을 통해 말씀하시고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마치 5만 볼트 전류를 가정에 공급하기 위해 중간에 변압기를 설치하듯이 선지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무엇보다 마음이 정직한 백성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십니다.
2. 요시야 왕
성경에 보면 요시야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요 여호와 보시기에 바르게 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정직하고도 바르게 대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자기와 자기 백성에게 선포된 두려운 심판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어 선지자인 훌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요시야에게 훌다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있어 그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들의 소원에 맞는 교사들을 주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 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거짓된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교사들이 주어져 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다. 악한 왕 아합에게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가 있어 아합을 거짓된 길로 인도합니다. 나아가 악한 사람은 좋은 하나님의 메신저를 만나도 그를 오히려 핍박합니다. 헤롯 대왕은 세례요한의 충고를 거부하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써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이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거짓되면 하나님은 다른 교사들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뜻대로 가르치지 않고 우리의 뜻에 영합합니다. 우리의 정욕을 부추기고 우리가 멸망의 길에 들어서도록 유도합니다. 이단에 속한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치 혀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사람을 마수의 길로 유혹합니다. 청교도 리차드 십스는 “이런 자들은 지옥에 갈 때에도 그럴싸한 복장을 차려 입고 간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자들은 교만합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교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는 너무 단순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기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새롭게 말씀을 추가하여 조작합니다. 그들은 더 많은 제사, 더 많은 의식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거들먹거리고 통치자로 군림합니다. 그들의 자세는 건방지고 그들의 마음은 완고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자신은 무오한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요시야의 반응을 찬찬히 보면서 성화의 은혜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첫째,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적인 귀머거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에겐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마음이 연약하였다’(라크 레바브카 와틱카나)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특성을 가리킵니다.
1) 연약한 마음은 늘 민감합니다.
여기서 민감하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감각을 가리킵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이 있고 생명을 보존하려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모든 생명체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민감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시고자 인간 안에 두려움과 사랑 같은 감정을 심어두셨습니다. 두려움 덕분에 인간은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절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약 두려움이 없는 인간이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사랑에 민감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자를 분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인간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을 일러 ‘괴물’이라 불렀습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물리학자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창조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수없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얻은 사체들을 조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든 새 인간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습니다. 그가 만든 새 인간은 한 마디로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거대한 체구에 큰 머리, 짱구같이 툭 튀어나온 이마에 스테이풀러로 찍어 붙인듯한 흉터와 양쪽 관자놀이엔 나사못이 박혀 있는 끔찍하게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괴물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언지하에 괴물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괴물이 자신을 자꾸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며 그를 버리고 멀리 떠나버립니다. 그러자 괴물은 자기를 버린 비정한 아버지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한 가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인간의 언어와 관습들을 익히고 사유의 능력마저 갖춘 다음 드디어 마을로 숨어들어 프랑켄슈타인의 동생과 아내를 살해하고 북극으로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지 못하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 뿐 아니라 몸까지 아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촉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합니다. 이것이 오래도록 방치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의식 속에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계속)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