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니라”(막 10:19~2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5~7)
1. 개혁교회의 핵심적 교리
개혁교회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항하여 일어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대륙의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하는 장로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스위스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확산된 칼빈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은 제네바와 헝가리, 루마니아, 화란과 남아공,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 독일의 모라비안 등을 포함한 일부 개신교인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호주, 그리고 일본과 한국교회들까지 실로 전세계적인 범위에 확산된 교회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개혁교회들, 즉 루터파, 장로파, 개혁파를 포괄하는 핵심적 사상을 들라면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종교개혁시기에 이 사상이야말로 기존의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유럽 대륙을 강타했습니다. 사도 이래 전례 없는 권세와 능력으로 교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던 사람들이 새로운 구원교리에 빛을 보고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율법적인 행위와 공로를 요구하던 가톨릭교회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의 복음만이 죄인에게 참된 구원과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교회사의 유물이 된 듯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이신칭의’의 사상은 많이 퇴색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청년들에게 ‘칭의’가 무엇이냐 물으면 매우 낯설어 합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이 세속화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낙스신학교의 교수였으며, R.C 스프라울의 스승이기도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신학>의 저자였던 존 거스너(J. Gerstner, 1914~1996) 박사는 자신이 어느 날 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칭의’ 교리를 가지고 열심히 강론했는데 다음날 지역신문에 관련기사의 제목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기사 제목이 ‘칭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그냥 ‘휴가떠나기’였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신학자의 담론을 그저 일상적인 대화 정도로 치부해 버릴 만큼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적인 구원교리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불변의 법칙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구원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의 구원법칙입니다.
2. 이신칭의란?
성경은 ‘이신칭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합니까?
1) 먼저 성경은 칭의가 우리의 난제인 죄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바로 알아야 칭의를 이해합니다. 19세기 유명한 개혁주의자인 존 라일은 <거룩>에서 “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칭의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은 교리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단어나 명칭이 될 뿐이다”고 하면서 “오늘날 모든 이단과 거짓 교리들은 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인”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악성 종양에 걸린 암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의사가 단순한 질병이라고 오진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잘못된 진단이 가져올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것입니다. 정작 환자는 죽음 직전에 처해 있어 당장 수술을 받아야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천하태평으로 있다면 그의 생명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서운 독버섯이 자라고 있음에도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
지금 누구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은 선민이며 율법을 가진 특별한 백성으로서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며 양심적인 민족이라고 자신만만 하는 유대인들을 앞에 두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양심 운운하고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고 자고 하는 요즘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너무나 냉정합니다.
2) 다음으로,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입니다.
칭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관계없는 오직 하나님만의 의로운 판단이시자 뜻이자 거룩하고 완전한 행위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원래 칭의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피고인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사단에 의해 죄목들이 정해지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때 재판장인 판사에게는 두 가지 판결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죄‘(guilty)이고 하나는 ’무죄‘(innocent)’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하나는 ‘정죄’이고 하나는 ‘의롭다 함’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법정에서 유죄라면 감옥살이를 하거나 사형을 당하지만 하나님나라의 법정에선 지옥행이고, 무죄라면 세상 법정에서 죄인의 결백이 입증되지만 하나님나라의 법정에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뒤따릅니다. 하나는 ‘누가 의롭다함을 받느냐’이고, 두 번째 질문은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의 무엇을 보고 의롭다해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이 이신칭의의 핵심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 8장 33~3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마가복음에서 부자는 자신의 율법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하시자 부자는 바로 그 지점을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정리하면, ‘의롭다함’ 즉 ‘칭의’를 받는 사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은혜의 선물이며 이들이 칭의를 받는 유일한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이신칭의 복음의 재발견입니다. 루터는 칭의는 인간의 행위가 개입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며. 오직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 해 주시는 법정적인 선언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렇다고 루터는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들이라 인정해 주셧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두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 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는 의인으로 칭함을 받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칭의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의는 즉각적이고 단회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 즉시 의롭다함을 받고 일단 한 번 칭의를 얻는 사람은 다시는 그것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일에는 취소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말을 뒤집는 분이 아니시고 상황에 따라 내로남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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