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부흥이란 무엇인가? 부흥은 “Revival”, 즉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 죽었던 인생이 다시 살아나고, 죽었던 가정이 다시 살아나고, 죽었던 교회, 죽었던 나라, 죽었던 우리의 다음세대가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저는 이 부흥이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에 불 붙어 있는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열망임 을 믿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부흥”이다. 메마르고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마른 뼈와 같이 죽어 가는 다음세대들의 부흥을 향한 갈망이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의 중심에 불타오르는 갈망이 되어야 한다. 교파를 초월하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부흥은 언제나 시대적으로 가장 어두운 암흑기에 시작되었다. 잘 먹고 잘 살 때는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매일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좋은 사람들과 인생을 즐길 때는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어렵다. 말 그대로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깨닫게 되는가?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잘 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안정적으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가 되었을 때, 부족함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부족함이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영적인 부흥을 향한 갈망이 시작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우상 숭배하며 잘 살고 있을 때는 자신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언제 알게 되었는가?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의 죽어 있는 영적인 상태를 자각하게 되었고, 비로소 부흥의 토양이 준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한일합방까지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민족적인 암흑기” 속에서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 개인이든 한 민족이든, 부흥은 가장 어두운 암흑기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26:17-18)

이삭의 가족이 우거하게 된 광야에는 물을 얻을 수 있는 우물이 없었다. 당장 죽을 수도 있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그 때 이삭은 지체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우리는 새로운 우물을 찾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면 된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팠다. 목마름은 해결되었고 생수가 넘쳐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부흥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팠던 생수의 근원을 다시 찾아내어 거기서 부흥의 생수를 길어 올려야 한다. 초대교회의 선조들이 남긴 우물이었던 “오순절”을 다시 기억해야 하고, 죽어 있는 한민족을 다시 살려 내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하는 우물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다가올 “부흥의 여정”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지나간 “부흥의 궤적”을 다시 탐구하여 그것을 다시 복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 설명]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막9:28)

귀신들린 이 “소년”은 죽어 있는 오늘날 이 땅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그러나 결국 실패한 “제자들”은 영권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시급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답변하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9)

제자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첫번째 이유는 이 아들의 문제가 “이런 종류”의 문제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이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아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종류를 먼저 정확하게 이해 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들이 직면한 문제의 종류는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다. “외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아들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율법학자들과 “변론”(논쟁)을 하고 있었다.(막9:14)

제자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아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제자들이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에 실패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도 잘못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다. 문제의 “진단”이 잘못되어 있다. 그러니 “처방”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속)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