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2)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신다. 나를 해치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더해 지고 더해지고 또 더해지면 결국 다 나를 위하는 일로 결론 지어진다. 이것이 섭리의 신비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섭리의 신비를 잘 보여주는 인생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요셉: 형들의 시기+살인 미수+보디발의 노예+누명+감옥 = 총리
룻: 기근+이민+죽음+과부+빈털털이+이삭 줍기+결혼 = 다윗의 증조 할머니
이와 같은 삶의 방정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즉 나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는 “섭리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고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징계 안에 담겨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해 주고 있는 “섭리 교과서”다. 오늘 본문에서 토기장이의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하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의 이름이 바로 에스더다.
에스더는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바사 제국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바사 제국의 왕은 아하수에로 왕이었는데, 왕이 왕후 와스디를 잔치에 초대하였지만 거부하였다. 화가 난 왕은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새 왕후를 뽑게 되었다. 에스더는 자신의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권면을 받아 왕후 자리에 응모하게 되고, 결국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되었다. (포로 + 고아 = 왕후) 그러던 어느 날 아하수에로 왕의 오른팔과 같은 하만이라는 사람이 대궐 문 앞을 지나갈 때, 모든 왕의 신하들이 하만 앞에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다. 화가 난 하만은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은 부족하고 모르드개의 민족 전체를 다 멸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와 같은 민족적인 위기에 처한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에게 이 모든 상황들을 전달하고,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하며 에스더의 역할을 독려한다.
“당신은 모든 유다인을 다 모으로 나를 위하여 금식하라. 왕의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음모는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높이가 50 규빗이나 되는 나무 장대를 세워 놓고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 전체를 멸절시킬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그런데 그날 밤, 마침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를 않아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읽게 하였는데, 그 때 마침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모르드개의 고발로 무산되었던 부분을 읽게 되었다. 그 사실을 처엄 알게 된 왕은 모르드개에게 어떤 영예와 지위를 보상했는지를 물었고, 아무 보상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왕은 “누가 바깥에 있느냐?” 자신의 신하를 불렀고, 그 때 마침 하만이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가려던 참이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높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돌아간 하만은 결국,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만의 분노 + 하만의 계략 + 나무 장대 = 하만의 죽음/이스라엘 승리)
우리는 곤경이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모든 일들이 나를 해롭게 하고 있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태롭게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들과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온갖 환난들을 겪는 가운데서도 큰 의지와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이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일들을, 모든 사람들을 주관하셔서 결국에는 우리들에게 복되고 행복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과 곤경에 처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무거운 짐에 눌려 있을 때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지배하고 있는 섭리의 신비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기도에 놀라운 생명과 소망을 불어 넣어 준다. 이것이 징계의 목적이요, 징계를 받는 우리 모두의 합당한 태도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부터 건짐을 받은 그 놀라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 날을 “부림절”로 정하고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날을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다. (에 9:28)
이스라엘 부모들은 자녀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신 섭리의 신비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이름들을 붙여 주었다. (삼상 1:20) 그들이 하나님의 주목할 만한 섭리들이 일어난 장소들의 이름을 새롭게 개명한 것도 거기에서 그들에게 큰 유익을 끼쳐 주었던 달콤한 섭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새로운 명칭들을 만들어서 붙여서 하나님이 새로운 이름들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고 (창 22:13-14) 기드온은 “여호와 샬롬”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삿 6:24) 하나님이 스스로를 어떤 명칭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창 15:7),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삿 6:8).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역사하셨던 섭리의 신비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을 둘러싸고 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쳐 주시고, 그 아래 스스로 낮추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징계의 목적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여 고침을 받아야 한다. 그와 같은 고침을 받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바로 “회개”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무지하여 인정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만물의 머리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삶의 태도로 변화되는 것. 하나님의 주권 아래 스스로를 낮추어 자신의 삶의 태도를 고침 받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다.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