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법원이 중증 장애를 가진 딸을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일이 있었다. 검찰이 징역 12년을 구형한 살인범에 대해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건 매우 이례적이라 세간에 화제가 됐다.
재판부가 사회 통념과 법리에서 벗어난 판결을 한 이유는 이랬다. 재판장은 “장애인에 대한 국가나 사회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들은 오롯이 자신들만의 책임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피고인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면 재판부의 판결에 수긍이 간다. 숨진 딸은 태어나자마자 의료사고로 거동은 물론 의사 표현도 제대로 못 하는 1급 지적 장애아 판정을 받았다. 그런 딸을 38년 동안 거의 혼자 보살펴야 했던 어머니에게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딸이 3기 대장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딸이 고통을 호소하자 어머니는 같이 죽자며 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자신도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으나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다.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그때 당시에는 제가 버틸 힘이 없었다. ‘내가 죽으면 딸은 누가 돌보나. 여기서 끝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 정말 미안하다. 난 나쁜 엄마다”라며 눈물을 흘렀다고 한다.
살인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피치 못할 살인이란 걸 인정하게 되면 그 어떤 구실로 살인의 정당성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죄는 밉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에 동정이 간다. 재판장이 선고 이유에서 밝혔듯이 이 모든 책임을 어머니 한 사람에게만 지우는 건 가혹하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70대 노모와 40대 딸이 ‘폐를 끼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경찰은 이 모녀가 채무 부담 등을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대문구에서도 숨진 채 발견된 모녀도 생활고가 원인이었다. 이들이 살던 집 현관에는 수개월째 공공요금 연체 고지서가 쌓여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복지 사각지대’란 말이 붙는다. ‘복지 사각지대’란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정부가 주는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부가 일정한 규정을 충족한 기초 생활 수급자에게 주는 혜택을 규정을 충족하지 못해 받지 못하는 차상위 계층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6.25 전란을 겪으며 폐허 위에 기적을 꽃피운 나라로 세계가 부러워한다. 유엔의 원조를 받던 최빈국이 1인당 국민 소득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섰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의 대열에 당당히 섰다.
그런데도 이런 비극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건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다. 정부 예산이 한 해 600조 원이 넘는 나라에서 장애인 ‘독박 돌봄’에 지쳐 자식을 살해하고,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사건의 책임을 당사자 개인에게 떠넘길 순 없다.
지난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일어났을 때 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에 빠졌다. 정부는 관련 복지제도를 개선해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공언했고 사회와 교회들도 반성하고 각성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그런데도 9년째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또한 1차 책임이 국가에 있고 다음은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중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건 인간이 유일하다. 모든 생명이 귀하지만 특히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증거가 바로 인간이 가진 사랑과 자비의 마음, 즉 ‘귱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남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창립 이후 소외계층을 돕는 사업을 중점적으로 진행해 온 한국교회연합이 올해도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에서 ‘사랑의 연탄 나눔 행사’를 열었다. 한교연은 이날 연탄 2만5천장을 기증하고 임원들이 직접 지게에 연탄을 지고 나르는 봉사에 참여했다. 한교연이 지난 10여 년간 소외된 이웃에 전달한 연탄은 30만 장에 이른다.
한교연 뿐 아니라 많은 교회와 기관, 선교단체들이 이웃을 위한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여전히 많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엔 이만하면 됐다는 끝이 없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야 할 성도로서의 마땅한 본분이다.
‘재의 수요일’(21일)에서 시작해 부활절 전날까지 40일을 일컫는 사순절이 시작됐다.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로 지켜오고 있지만,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관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걸 뜻한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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