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이다. 하나님은 영 죽을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그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 크고 깊은 비밀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서 이루신 인격적이며 구속적인 사역인 구속사(Salvation history)에 나타나 있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기 3장과 이사야 53장에 기록했듯 ‘메시야’를 약속하셨다.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성취됐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이 범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걸 그대로 두고만 보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인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공생애 3년간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이미 실현되고 성취되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리라”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만 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절기인 동시에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에 매진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성탄절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렇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절기인가 싶다. 세상이 온통 크리스마스 시즌에 들뜨니까 교회도 덩달아 그 분위기를 뒤좇아가는 형국은 아닌가.

교회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 맞이할 이유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다. 내 공로, 치적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감사 또 감사할 것밖에 없다.

그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가 성도가 교회에 드리는 헌금이다. 그런데 헌금은 내 마음의 정성을 나타내는 지표일 뿐 아무리 액수가 커도 나를 살리신 은혜와 조금이라도 바꿀 순 없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몸과 시간을 바쳐 봉사와 구제에 힘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교는 나 스스로 도를 깨우치고 공적을 쌓아 구원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만약 교회가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과 봉사, 구제 등으로 성탄 축하의 가치를 매긴다면 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외쳤다. 이는 루터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부패에 대항한 모든 개혁자들의 몸부림이었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한 외침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중세 암흑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비 성경적인 전통과 우상숭배를 끊어내고 비로소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죄 사함의 권세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선포한 데 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헌금과 봉사, 구제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다만 교회는 자기 공적이나 치적이 주님의 은혜를 대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이교도적인 반신앙 행위인지 반드시 깨우쳐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그 순간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천사는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셨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즉시 ‘빈 무덤’을 떠나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본 사람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장소마다 독특한 양식의 성당이 세워지고 그 성당을 구경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 태어나신 ‘말구유’를 신성시하는 걸 과연 복음이랄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온 인류에 ‘샬롬’(평화)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성탄절을 온 누리에 전하고 축하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 함께 차분하게 살펴야 할 게 있다. 오늘 교회에 과연 예수님이 계시는가. 천사의 말처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이미 떠나신 건 아닐까. 예수님이 안 계신 ‘말구유’, 이미 떠나신 ‘빈 무덤’에 둘러앉아 공허한 성탄 축하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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