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아프리카의 교인들(상기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함). ⓒPixabay

10년 동안 뉴욕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선교 책임자로 사역한 크리스티나 레이 스탠튼이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하나님이 힌두교도의 개종을 사용해 수천명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재했다.

스탠튼은 “빈곤, 범죄 및 불의와 관련된 문제는 이웃, 도시, 심지어 국가를 압도할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문제에 직면해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라고 글을 시작했다.

이어 “그러나 아룬쿠마르 ‘마이크’ 선커와 같은 사람들은 ‘희망 없는’ 상황을 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끝없는 기회를 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일을 시작한다”라고 했다.

스탠튼은 “마이크가 2021년 사망할 때까지 수천 명을 도왔고, 그의 삶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의 능력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라며 “마이크의 사랑과 봉사의 유산은 특히 그의 가장 성공적인 노력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힐브로우 지역에 소재한 크라이스트 처치 크리스천 케어 센터를 통해 계속된다”라고 했다.

스탠튼은 “7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이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안정적인 환경으로 데려와 보호, 양육 및 교육을 제공했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의 진정한 승리자로 존경받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마이크는 또한 자신의 영적인 빈곤에서 그를 구원하고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으신 구세주에게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라고 했다.

스탠튼에 따르면, 마이크는 1947년 7월 4일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인도에 뿌리를 둔 그의 부모는 힌두교도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다. 마이크와 그의 8남매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자랐다.

마이크가 1970년 레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 선교사들이 집에 찾아와 마이크에게 복음을 전하자 마음이 동요되었다. 읽을 책을 찾던 마이크는 어느 날 아버지가 옷장 위에 던진 먼지 투성이의 성경을 발견했다. 1975년 10월 23일 오후 6시 30분, 마이크 선커는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바쳤다.

레누와 아이들은 그를 따랐지만 대가족은 처음 그를 거부했다. 마이크의 아들인 아지쓰는 “마이크의 개종 1년 만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부모와 복음을 나눌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삶에서 당신의 능력을 계시하셨다”라고 했다.

마이크와 그의 가족은 인디언 공동체의 개혁교회를 출석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두 명의 성공회 선교사가 마이크에게 제자 훈련을 지도했고 마이크는 그의 믿음을 나누는 데 열정을 쏟게 되었다. 그는 선교단체에 합류한 후 1979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성경대학에 다니기로 결정했고 졸업 후에는 현재 ‘REACH SA’로 알려진 남아프리카 성공회에서 전임 목사가 되었다.

스탠튼은 “마이크는 피닉스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피닉스 교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간주되며 높은 수준의 빈곤, 실업 및 범죄로 유명한 지역인 크라이스트처치 힐브로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라고 했다.

마이크는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지역의 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운 시기에 처한 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리에서 노숙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교회에서 급식소를 시작했고 수백명을 환영하는 쉼터를 열었다.

1999년 힐브로 주변 미첼 스트리트 호텔이 시장에 나왔고 마이크는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아지쓰는 “아버지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교회와 단체, 기업을 방문했다”라고 말했다.

마이크는 호텔을 고아원으로 등록했고 2000년 비영리 단체가 되었다.

마이크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고아원에 수용했다. 센터는 4~5명의 아이들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고아원이 아이들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나자 요하네스버그 당국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시설이 120명의 수용 인원에 도달하는 데 불과 몇 년이 걸렸다. 센터는 2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두 개의 캠퍼스로 확장됐다.

마이크의 아들 아지쓰는 “아버지가 좋은 교육이 성공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라며 “아이들이 이곳에 왔을 때 기초 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았다. 여러 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어린이를 등록했다”고 밝혔다.

마이크 목사는 학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아이들의 영적 발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0년 동안 그는 모든 어린이를 위해 그 곳에 있었고 실제적인 필요를 제공하고 하늘 아버지를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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