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한민국 건국

송병기 박사
송병기 박사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자 소련은 부랴부랴 일본에게 1945년 7월 28일에 선전포고를 한뒤 만주와 한반도에 침공을 개시했다. 소련은 일주일만에 북한으로 들어와 점령했다.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지점으로 소련과 미국이 나누어 무장해제를 시키기 위한 결론으로 지어졌다. 1945년 10월 16일 맥아더의 군용기를 타고 해방 두 달 후에 개인자격으로 들어와 10월17일 아침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5만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때 연설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말이 당시 유행되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는 공산주의, 민주주의 , 사회주의등으로 혼란으로 가득한 시대였다.

공산주의 이념을 이끈 사람은 박헌영,여운영 등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1945년 11월 23일에 신문기자들과 인터뷰에서 나라를 세운다면 기독교를 비반으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으며, 오랜 미국 생활에서 익힌청교도적 삶의 태도에 바탕을 둔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고 싶으며, 헌법은 성경을 기반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며 성경을 아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지름길이다라고 했다.이승만 대통령은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군목제도도 인허했고 기독교인이 세운 사립학교에는 교목 제도를 주고 전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당시는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100만 명이 넘었다.

이승만 박사는 오랜 군주정치를 막내리고 새로운 민주 공화정을 만들어 첫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하여 남북한에서 투표로 국회의원을 뽑아 나라를 그들에게 맡기자는 안이 표결되었다. 그 골자는
1) 공정한 선거 감시를 위하여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한다.
2) 한국 국민의 대표 선출을 위하여 48년 3.1일 이전의 인구비례에 의하여 보통선거와 비밀 투표 원칙에 의한 선거를 실시한다.
3) 선거 후 이들 대표자들이 가급적 속히 국회를 소집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원단에 통고한다.
4) 정부는 남북한 군정 단국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이양받고 자체 국방군을 조직하여 가급적 속히 가능하면 90일 내에 점령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과 협의한다. 는 내용의 결의 안이 체결 되었다.

결국 남한 군정은 1948년 3월1일에 5월10일에 선거를 할 것을 공포하였다. 선거를 앞두고 반대의 세력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것이 제주도에서 4.3폭동이 일어나 무정부상채로 되어 제주도의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못하였다. 결국 전국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이승통령으로 18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부대통령에는 이시영이 피선되었다. 첫 국회가 모일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 나라를 건설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며 이윤영 국회의원에게 기도를 하게 하여 국회가 시작되었다.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되고 1948년 8월15일 대한 민국 정부수립을 전세계에 알리는 건국식을 하게 되었다.

건국일 기념식에서 리승만 대통령의 연설 요지

1) 민주주의 실천
2) 인권과 자유의 보호
3) 정부 전복 행위 엄단
4) 근로자 우대
5) 통상과 공업의 발전
6) 통일의 노력등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서 민주 공화국으로 성립하였다. 국민 재산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 경제 체제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총령은 취임식에서 헌법 책 위에 성경 책을 올려 놓고 선서하면서 우리민족을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는 충실한 사람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나가겠다고 선서했다.

10. 한국동란 (6.25사변, 6.25한국전쟁)

38선 이북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후원을 힙입어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리승만은 대통령이 된지 1년만에 미군들의 병력의 철수를 한다고 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만일 철수하면 공산당들이 밀고 내려올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는 일본이 두고간 총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거기서 만들어 낸 것이 다발총이다. 연발로 나가는 최신 무기다. 소련제 탱크도 242대 있고 비행기도 211대가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탱크도 없고 연습용 비행기 포함 22대 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여서 강력하게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트루만은 1949년 6월30일 일부만 남기고 철수를 감행했다. 결국 1년 후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휴전선 전역에서 탱크 242대를 앞세워서 남침하며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은 빌리 그레함이 일조를 했다.

그의 아내는 조선 선교사의 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통을 보내서 압박을 했다. 당시 기독교인이 50만이었는데 미국이 돕지 않아 그 사람들이 다 죽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의 파병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때 국방장관이었던 죤 포스터 덜레스였다. 그는 미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에서 구출해야 된다고 했다. 그는 죠지워싱톤 대학에서 같은 방을 사용한 동창생이며 프린스턴에서 박사논문울 같이 쓴 친구였다. 리승만의 정치철학 기조는 자유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과 친절하게 지내는 외교였고 반공투쟁이었다.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일주일 만에 전쟁에 참여하였다. 1950년 6월 28일 한강다리 폭파로 인민군들이 내려오는 것을 차단했지만 피난민들이 한강으로 떨어져 수없이 죽었다는 이유로 공병대장이 처형 되었다. 훗날 사형시킨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어 명예는 회복 시켰지만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것이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북한은 남한을 모두 점령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한강 철교는 1950년 7월3일에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끊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병사의 한국전쟁 파병이 원폭 투하 결정보다 어려웠다고 말했다. 전쟁이 발발했을때 리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화하여 “내가 뭐라고 했냐 미군이 철수하면 공산당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호통을 치며 미국이 책임지라고 했다. 일주일 만에 미군이 참전하고 보름만에 유엔군이 16개국이 참전한다. 전쟁에 많은 유엔군이 희생되었다. 미국은 4만 여명의 전사와 10여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도 거의 1만명이 희생되었고 많은 부상자를 냈다. 휴전을 생각하고 있을때 리승만 대통령은 이 기회를 통하여 북진하여 통일을 이룩하자고 했으나 미국이 거부하여 못한다. 원자탄을 중국에 터트리자는 말에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휴전선으로 매듭을 진것이다.

1951년부터 막후에서 휴전을 협상했지만 리승만 대통령은 그러면 휴전에 앞서 한미상호조약을 맺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속한 시일내에 휴전할 것만 생각한 미국에 대해 리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조약을 맺고 반공포로를 석방해줄 것을 주장한다. 머뭇거리는 미국의 콧대를 꺽기 위하여 휴전체결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리승만은 헌병대장 원용덕에게 포로수용소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미군과 유엔군을 기습하여 반공포로를 탈출시키라고 명령했다. 1953년 6월18일 작전이 시행되고 부산,마산,대구,영천,논산, 광주, 부평에 있는 수용소에서 26900명이 탈출하여 61명이 사살되고 116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미국 측에서 리승만 제거운동이 전개 되었다. “공산침략을 막기위해 전쟁하는 우리가 공산주의가 싫타고 애걸하는 포로를 다시 공산국가로 돌려보내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나는 우리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반공포로 석방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기독교 교계에서는 리승만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학계에서느 위해단 지도자라고 했다.

이때 아이젠하워는 마음을 바꾸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속히 마무리할 것을 지시하여 1953년 7월27일 휴전후 서둘러 1953년 10월1일에 조약이 체결되고 1954년 11월18일에 발효되었다. 반공포로란 전쟁에 포로가 되어온 15만명 중에 자유 대한민국을 좋아하는 3만 7천명을 포로 교환하지 말고 남한에 살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북한에 가면 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한 민족의 수장으로 볼수 없다며 그들이 남한에 살도록 석방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 보내야 한다는 결정에 리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결정한 것이다. 경찰과 군인들에게 명령하여 반공포로들의 길을 열어주고 잡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7천여명을 자정부터 5시까지 비밀리에 석방했다.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공산 측과 휴전에 합의를 본 뒤 한국을 떠나려 한다면 단독으로 북진을 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였다.

송병기 박사(뉴욕장로회신학대 전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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