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SNS를 통해 "캐나다 노 신사와 현대자동차 딜러의 감동 실화"가 널리 전파되었다.
2012년 11월 12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인근의 미시소거(Mississuga)에서 현대자동차 딜러로 일하던 신상묵(34)은 차를 사러 온 노인으로부터 형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했는데, 한국에 묻힌 형의 무덤을 찾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의 이름을 물었더니 “Roy Duglas Elliott.”이라고 알려주었다.
노인의 딱한 얘기를 들은 신상묵은 그 형의 무덤을 찾아주기로 작심하고 탐문하던 중에 부산 유엔기념공원 인터넷 사이트의 ‘안장자 리스트’에서 ‘Roy Duglas Elliott’의 이름과 '묘비 번호 1392'가 새겨진 사진을 발견했다. 신상묵은 묘비 사진을 현상해서 액자에 넣고, 다음 날 오후 차를 찾으러 온 엘리엇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액자를 끌어안고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60년간 형의 이름만 부르며 기도했는데… 정말 고맙다."하고 말했다. 감격에 젖은 그에게 한국인 청년 신상묵은 말했다. “당신의 형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엘리엇 씨.”
그런데 이 미담거리는 이미 2012년 국내 언론에 "6·25전쟁서 전사한 형 묘비, 60년만에 발견한 캐나다인 할아버지의 눈물"(조선일보 2012.11.23)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내용이다. 이후 엘리엇은 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형의 묘소에 참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올 6월에 다시 SNS를 타고 그 사연이 국내에 다시 알려진 것이다.
6·25전쟁 때 캐나다는 2만6791명을 파병해서 UN 참전 16개국 중 미군과 영국군에 이어 세번째로 그 수가 많았다. 당시 캐나다군 전체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상군 개편 작업을 통해 병력을 감축하던 캐나다는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자, 30일 캐나다 하원은 한국전쟁의 참전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어 8월 7일 캐나다군 특수부대(CASF) 창설을 발표하고 8일만인 15일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연대(PPCLI) 제2대대를 창설하였다.
이들은 미 군함 마티네즈호를 타고 11월 25일 부산에 상륙한 후 8주동안의 산악훈련을 마친 1951년 2월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때 캐나다군 제2보병 대대는 호주군 왕실 제3대대, 뉴질랜드군 제16포병 연대와 함께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를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에 소속되어, 4월 23일부터 서울과 춘천을 연결하는 주 보급로인 가평전투에 참가하였다.
중공군이 강원도 화천의 사창리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해오자 영연방 제27여단은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중공군이 가평을 점령해서 서울-춘천을 잇는 국도를 따라 남하하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측면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서쪽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하고, 동쪽 504고지에는 호주 대대를 배치한 후에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했다.
23일 밤부터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해 남하해 온 중공군 제118사단이 도로와 계곡을 따라 가평 방면으로 접근하면서 대규모 병력으로 호주 대대가 지키는 504고지에 공격을 가해왔지만, 호주 대대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면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호주 대대는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상당수 발생한 데다가, 중공군에 퇴로가 차단된 채 포위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영국군 대대의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에 중공군은 24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캐나다 보병대대가 지키는 677고지를 집중 공격해왔다. 밤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캐나다 보병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캐나다군은 450명에 불과했지만, 중공군은 6천여명에 달하였다.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13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전투였다.
결과 중공군은 1천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그에 비해 캐나다 대대는 전사자 47명에 부상자 99명에 부상자가 발생했다. 6.25전쟁사에서 백마고지 전투와 펀치볼 전투와 더불어 '3대 백병전'으로 불리우는 기적 같은 승전보였다.
가평 전투에서 케나다군을 주축으로 영연방 제27여단이 3일 동안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은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도로를 지켜냄으로써 전선을 분할하려는 중공군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가평 전투에서 큰 좌절을 겪은 중공군은 이후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퍼붇지 못하고 38선까지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어 한국전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가평 전투에서 승리한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에게서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는데, 캐나다군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수여 받은 최초의 표창이다. 현재 캐나다에 있는 모든 전쟁기념물과 주 의사당에는 한국 전쟁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캐나다인들은 가평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캐나다군의 위니펙 주둔지를 가평(Kapyeong Barrack)이라고 명명하였고, 컬럼비아브리티시주의 랭리시아보레텀공원에는 가평전투 참전을 기념하는 가평석이 세워졌다. 캐나다의 도로이름에도 가평(Kapyong Rd)이 들어가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그런데 엘리엇(Roy Duglas Elliott) 상병은 가평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는 가평전투가 끝난 직후인 1951년 5월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연대(PPCLI) 제3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휴전을 3개월 앞둔 1953년 4월 17일, 스무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한국유엔기념공원에 수록된 <안장자 카드>에는 그의 몸에는 80%가 화상을 입었으며, 인식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폭발물 사고이거나 적의 폭탄 투하로 인한 사망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그러면 그 장소가 어디일까? 여러 날을 엘리엇 상병의 죽음을 추적하던 필자는 캐나다 출신의 6·25 참전용사인 빈센트 R. 코트니(Vincent R. Courtenay·87)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1951년 16살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였고, 캐나다 앨버타에서 군사 교육을 마친 뒤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연대(PPCLI)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18살의 나이로 자원입대한 엘리엇 상병과는 같은 부대 소속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고담을 통해 엘리어트 상병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미군 수송함에 몸을 싣고 부산항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공포와 두려움의 냄새를 맡았다. 비좁은 기차를 타고 올라간 전장의 최전선은 참혹 그 자체였다. 배에 총을 맞고 쓰러진 동료의 피부가 녹색빛으로 변해가던 걸 잊을 수 없었다. 한번은 3일을 꼬박 밤새우며 카펫처럼 납작해진 시체 위를 다녀야 했다. 폭탄이 터지면 그때마다 지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고,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뱀처럼 기어다녔다. 운이 좋아서 아무도 죽지 않으면 그제야 안도했고, 적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빈센트 코트니, 「처참했던 6·25, 캐나다 돌아가 한국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선일보> 2020.6.20)
그의 회고담 중에 "폭탄이 터지면 그때마다 지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아서 아무도 죽지 않으면 그제야 안도했고, 적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증언처럼, 엘리어트 상병도 그렇게 지내다가 폭탄을 맞고 온 몸에 전신화상을 입은 상태로 전사하였을 것이다.
코트니가 증언한 전투는 '제2차 후크고지 전투'(1952.11.18-19)다. 그런데 엘리엇은 1953년 4월 17일 사망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후크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0월 초부터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7월까지 영연방 제1사단과 중공군 제118사단이 개성 부근에서 10개월을 맞서 싸운 전투인데, 영국군은 이를 통털어서 '후크고지 전투'라고 부른다. 제1차(1952.10.2-28) 후크고지전투부터 제2차(1952.11.18-19), 제3차(1953.6.28-29), 제4차(1953.7)까지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이 후크고지 전투에서도 캐나다군의 용맹은 특히 빛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캐나다군의 용맹스러움을 전해 들은 윈스턴 처칠이"'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If I had Canadian soldiers, American technology, and British officers I could rule the world.)라고 칭찬한 것처럼 한국전쟁 때도 캐나다군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 가운데도 겨울철을 맞아 치룬 동계전투는 전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엘리엇 상병은 제2차 후크고지 전투가 끝난 후, 제3차 후크고지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직전의 시간에 적의 포탄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장 기록 카드를 볼 때, 그의 전신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진 처참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편 코트니 일병은 전쟁이 끝난 뒤 죽음, 공포와 두려움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땅인 한국을 40여 년간 쳐다보지도 않았다. 갖은 전쟁 후유증과도 싸웠다. 그러던 중에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상전벽해를 알게 됐다. 이어 사업 차 서울을 찾을 기회가 생겼다. 40년 만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했을 때는 감격에 겨워 땅바닥에 꿇어앉아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그는 "세계 각 분야에서 선두를 질주하는 한국과 한국인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레 여기는 기여(contribution)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코트니는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면서 캐나다 출신 참전용사를 재조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방한 횟수만 40여 회에 이른다. 1997년부터 부산의 UN기념공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묻힌 유엔군 2300명 가운데는 캐나다군도 378명이 잠들어 있다. 그는 빛바랜 청동 장식판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6·25를 기억하지 않고, 전우들을 제대로 추모할 계기조차 없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캐나다한국참전기념사업회 디렉터로 참전용사를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면서 부산과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캐나다 전몰용사 기념비를 세웠다.
국가보훈처와 부산시가 2007년부터 개최하는 '턴 터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도 그의 아이디어이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6·25 참전 유엔군 전몰장병을 기리자는 뜻에서 UN기념공원을 향해 묵념하는 추모 행사다. 엘리어트 상병과 코트니 일병을 보면서 "캐나다의 10대 청소년들은 왜, 한국 땅에 와서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제는 우리가 그 물음에 답해야 할 때이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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