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6)
    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백만인구령운동'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흥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을 방문해 군산, 전주, 광주, 목포, 공주, 행주,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 목사는 '백만인구령운동'의 현장을 3개월간 목도하고,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 백종근 목사
    백만인 구령운동의 열풍 속으로
    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백만인구령운동'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흥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을 방문해 군산, 전주, 광주, 목포, 공주, 행주,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 목사는 '백만인구령운동'의 현장을 3개월간 목도하고,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5)
    하위렴이 처음 내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진 벨과 함께한 전라도 탐사 여행에서 남도에 지부를 세우기로 계획한 곳은 원래 목포가 아닌 나주였다. 나주는 오랫동안 전라도의 행정 중심도시였던 데다 무엇보다 영산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해로 나가는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4)
    1907년 선교사 공의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하위렴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도티Susan A. Doty 양을 회의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몇 해 전 자신의 결혼식을 바로 도티가 머물던 선교사 사택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녀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데이비스와 결혼식 이후 하위렴이 도티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3)
    전킨 선교사가 1902년 영명학교를 세울 당시만 해도 소학교 과정이 고작이었으나 1904년 하위렴이 부임하면서 중학교 과정도 설치했다. 그 당시 소학교 과정에 14명, 중학교 과정에 12명으로 전부 합해도 고작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위렴은 1904년 가을부터 1906년 2월까지 매일 2시간 30분씩 성경과 산수, 지리를 가르쳤다. 1907년이 되면서 학생이 늘어 46명이 되자 다시 어..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2)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 하위렴 선교사가 군산에 부임하던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정미의병의 여파로 기독교에 대한 수용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곳곳에 교회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으나, 교회 숫자에 비교해 목회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대다수 교회는 선교사들이 기껏해야 일 년에 두세 차례 순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두세 차례를 뺀 나머지 주일은 선교사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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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1)
    만자산교회(후에 지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오원집이 하위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조사가 되어 순회사역을 돕기도 했는데 그가 익산군 북일면 고현리로 이사하면서 친구인 오덕근, 김자윤, 오덕순 등과 함께 만자산교회에서 분립했다. 곧바로 곽도일의 사랑채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마침내 1906년 6월 1일 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고현교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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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0)
    하위렴이 군산에 부임했을 때 가장 시급했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스테이션 내의 구암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구암교회는 군산지부의 위상을 드러내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호남 최초의 모 교회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9)
    1899년 5월 군산의 개항으로 조계지가 그어지자, 전킨은 당국으로부터 기존의 스테이션을 조계지 밖으로 이전하라는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는 수덕산 선교지부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해안가 구릉에 3만여 평의 대지를 매입해 스테이션 이전공사를 시작했었으나 그가 전주로 떠나게 되면서 진행은 지지부진한 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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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8)
    하위렴 선교사의 다양한 사역은 의료, 복음, 교육을 넘어 스테이션 조성공사에도 미치고 있었다. 전주 선교지부로 사용하던 은송리 일대 완산 언덕의 땅이 왕실 소유로 밝혀지면서, 왕실에서 그 땅을 다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자 선교부를 이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완산 언덕에 있던 스테이션을 되팔고, 다시 스테이션을 옮겨 조성하는 사업은 그 당시에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사역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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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7)
    하위렴은 처음부터 복음 사역 이상으로 교육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릴 때마다 선교부 차원에서의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 사역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선교부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학교를 하나씩 시작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6)
    당시 그녀에게 붙여졌던 울트라 선교사라는 별명처럼 쉴 틈이 없이 사역에만 매달리던 데이비스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1899년에 접어들자 그녀는 휴식을 취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해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8회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주변의 동료들은 데이비스에게 안식년 휴가를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