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렴은 처음부터 복음 사역 이상으로 교육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릴 때마다 선교부 차원에서의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 사역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선교부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학교를 하나씩 시작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6)
당시 그녀에게 붙여졌던 울트라 선교사라는 별명처럼 쉴 틈이 없이 사역에만 매달리던 데이비스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1899년에 접어들자 그녀는 휴식을 취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해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8회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주변의 동료들은 데이비스에게 안식년 휴가를 권고했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5)
군산에 부임한 데이비스와 전주에 부임한 하위렴이 만나 결혼하게 된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아 소개하기로 한다. 남장로교 내한선교사로 조선 땅을 제일 먼저 밟은 데이비스는 1862년 버지니아 아빙돈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3살 되던 해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아버지를 잃고 신앙심이 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장로교 가정의 경건한 분위기 자란 데이비스는 어려서부터 오지의 선교사가 되기를..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4)
남도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하위렴에게 곧바로 전주 사역이 맡겨졌다. 6개월의 언어훈련과 짧은 탐사 여행만으로는 문화와 풍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었지만, 하위렴은 먼저 온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현장에 부임해야만 했다. 말로만 들었던 전주는 제주도를 포함해 전라도 전체를 호령하던 전라감영의 소재지로 호남의 수부首府였던 터라, 하위렴이 전주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4..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3)
조선에 파송된 개척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굳은 의지를 확인한 해외 선교부에서는 조선에 지속적인 선교사 파송을 약속하며 1895년 4월에 유진 벨Eugine Bell 부부와 그 이듬해에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 선교사를 연달아 파송했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2)
고향에서 초중고를 마친 하위렴은 1883년 레바논에서 동쪽으로 64Km 정도 떨어진 버지니아 리치먼드에 소재한 센트랄 대학(Central College) 화학과에 진학했다. 그 당시 루이빌에 주립대학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좀 더 경건한 학풍의 기독교 사립대학을 선택했다. 1871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버지니아의 햄던-시드니 대학(Hamden-Sydney College), 노스캐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는 주로 동부 해안가에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 1750년에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라는 영국인 의사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가는 고갯길을 발견했는데 얼마 후에 탐험가 다니엘 분(Daniel Boone)이 사람들을 이끌고 협곡을 넘어와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정착하면서 이 땅을 켄터키로 불렀다. 이때부터 켄터키는 서부로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