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역사 안에서 세속주의는 어떤 특징과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적으로 다음의 5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첫째, 세속주의는 현세주의다.
○ 세속주의와 현세주의는 동의어이다. 둘 다 ‘Secularism’으로 통한다. 그런데 현세주의란 과거나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현재의 삶에만 관심을 두고 현세 안에서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운다는 점에서 세속주의의 현재 상태를 일컫는다. 현세주의자는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에겐 내세 따윈 없다. 그 성공을 위해 재물은 필연적인 수단이자 훌륭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현세주의는 물질주의(Materialism)이자 황금만능주의(Mammonism)의 속성을 내포하고 지향한다.
○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현세주의는 기복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개인 중심의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에 매달려 왔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치하다. 철저하게 개인의 이기적 욕구 해소로 퇴화한 타락한 종교인의 모습이다. 이런 신앙은 교회의 역사적 배경이나 과거의 전통, 교회가 수호해온 교리 등에 무관심하다. 이런 신앙은 영적으로 매우 어린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교회의 유산인 교리나 신조 및 신앙고백서들을 백안시한다. 오직 복을 받기 위한 기복자의 모습으로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세속주의는 수평주의(Horizontality)이다.
○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눈은 앞으로는 향하지만 위로는 향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미래 그리스도인들의 세속화를 예견하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고 충고했다. 바울이 말하는 ‘위의 것’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속주의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 눈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의 것들을 바라보고 추구한다. 몸이 땅에 붙었으므로 땅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충고했다(골 3:5).
○ 조엘 비키(Joal Beeke)는 땅을 바라보는 세속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세속적인 사람들의 목표는 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수직적으로 사는 것보다 수평적으로 사는 것이다. 거룩함보다는 외형적인 번영을 추구한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 이기적인 갈망을 분출한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분을 무시하거나 잊고 산다.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이다”
○ 무엇보다 수평주의적 가치관에는 대신(對神)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대인관계에 집중하고 상호 평등과 공존과 상생 관계를 이상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수평주의자들은 위계질서에 따른 차등과 차별적 권위를 거부하며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선호한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봉은 17세기 때 중세 스콜라주의에 항거하며 이성 중심의 인간 해방과 자유 사상의 기치를 올리며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합리주의(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와 경험주의(베이컨, 홉스, 존 로크, 버클리, 흄 등)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형국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궁극적인 절대자, 즉 하나님 같은 신적 존재는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수평주의는 철저히 무신론이다. 이들의 상징물은 ‘Colonnade’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수평적인 회랑이 될 때 아름다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세속주의는 실용주의(Pragmatism)이다.
○ Pragmatism은 헬라어 pragma에서 유래한 말로 어원적으로 praxeis와 같다. praxeis는 행위, 또는 행동을 뜻하는데 여기서 착안하고 퍼어스(C. S. Peirce)가 자신의 논문에서 Pragmatism이라는 용어를 제조했다. 실용주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어떤 사상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그 사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만들어낸 행위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적인 측면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동적이고 과정적으로 파악하여 진리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이런 사유에는 모든 고정된 원리나 절대자의 존재가 배척된다. 퍼어스에 의하면 결과에 의해 실증되지 않고 실험에 의해 증명되지 아니하는 관념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 그러므로 실용주의는 과학적 증명이라는 점에서 실존적이며 실제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에 필요 부분을 채우고 유익함을 끼치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나 사상들은 폐기 처분된다. 이런 사상은 듀이(J. Dewey)에 이르러 교육학, 철학, 윤리학, 심리학, 미학, 논리학 등에 확산 응용되어 도구주의(Instrumentalism) 혹은 실험주의(Experimentalism)으로 발전되었다. 그는 기존의 기독교 철학과 사상을 거부하고 인간의 사고형태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의심하고 문제를 파악하고 가설을 제시한 다음 실험과 관찰에 의해 그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용주의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듀이의 교육론은 20세기 초에 형성 전개된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 사조와 관련하여 반기독교적 교육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 한편 실용주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장우선주의에 함몰되도록 유혹했다. 일명 ‘교회성장‘이라는 구실을 가지고 교회에 기업경영기법을 도입하고, 각종 성장 비법과 전도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는 등 교회의 부흥시대를 재촉했다. 심지어 이들은 성경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한 교회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가장 비실용적인 교회의 자산은 ’교리‘라는 것으로 이들에게 교리는 자신들을 가장 괴롭히는 괴물이다.
넷째, 세속주의는 인본주의(Humanitarianism)이다.
○ 인본주의는 신을 배제하고 인간을 숭배하는 사상에 기반하면서 인간 스스로의 자구적 노력으로 인간의 고통을 극소화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려는 윤리 도덕 운동이다. 인간의 본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의 실현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인본주의의 시조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415)로 본다. 근대에 들어선 콩트(Comte, 1798~1857)가 인간숭배의 길을 열었다. 그는 “경건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창했다. 이어 실러(Schiller, 1864~1937)가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그는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고 했는데, 그의 사상은 유럽 사회의 무신론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이후 지식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같은 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불린다.
○ 기독교 안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인격성만을 주장하는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한다. 이것을 이들은 ’역사적 예수‘라 일컫는다. 신학의 중심을 신, 계시, 성경, 그리스도보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 양심과 감정 등에 중점을 둔다. 이러한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를 필두로 리츨(Ritechl, 1882~1889) 학파가 뒤를 이었다.
다섯째, 세속주의는 자연주의(Naturalism)다.
○ 역사적 정통 기독교는 자연주의를 포용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초(超) 자연주의(Supernaturalism) 신앙고백 공동체이다. 그러나 기독교 초 자연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연주의 혹은 자유주의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채 초 자연주의적 입장을 힐난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천지창조를 인정하지만, 자연주의라는 전제(前提) 또는 가정(假定)하에서 논증한다. 자연법칙을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 오늘날에도 이들의 세력은 건재하며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무엇보다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자연주의자들의 독무대처럼 포장되어 있다.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도올 김용옥(한신대 명예교수)은 “초 자연주의 신앙은 미신”이며 “기독교는 자연주의 종교로 탈바꿈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지적한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그는 “나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판하는 사람이며 소신 있는 무신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강의나 저술들에 나타난 전반적인 그의 신관은 ‘유신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한다. 그가 믿는 신은 창조 후 자기가 만든 자연질서에 간섭하지 않으며, 세상은 오직 자연법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 칸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표방한다. 성경의 신적 계시성(啓示性)을 거부하고 성경이 증언하는 여러 가지 초자연주의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 벤자민 브레킨리지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함께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린다. 그는 기독교의 초 자연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신학에 대해 정통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맹렬한 공격을 주도했다. 워필드는 자연주의적 경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들었다. 이는 창조의 신이 창조 시에 자연계의 생명체에게 진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지금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다고 보는 창조론의 하나로 다윈으로부터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모든 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인정하고 현생 인류도 유인원과 인간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본다. 특히 유신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반기독교적이라고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켜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하나님의 창조라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 자연주의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워필드는 이런 유신 진화론자들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내쳤다.
○ 자연주의는 한국교회 안에 득세한다. 무엇보다 자연주의자들은 성경 무오성을 부정한다. 그뿐 아니라 자연주의자들은 시대적으로 낙오된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교회에서 버릴 것을 강요한다. 교회도 시대마다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시대의 조류에 합류하라고 외친다. 릭 워렌 같은 이는 교회음악도 시편 찬송 등과 같은 고리타분한 전통에서 벗어나서 세상의 모든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여 사람들의 입맛을 북돋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에 취한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회가 아니다. 자연주의 교회는 세상이 낳은 사생아이며 가장 세속적인 교회다. <계속>
최더함(Th.D/역사신학,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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