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존재하는 것은 진리인가?
기독인 고전 전문가들의 충격적인 사고방식
기독인의 적(敵)은 상대주의만이 아니다
고전(古典)은 잠깐 유행하는 책들과 달라 보인다. 시간의 시험대를 통과해서인지 그 모습이 아주 당당하다. 고전은 "영원한 가치가 담긴 작품"이라고도 하고,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누가 그 영원한 가치를 규정한 것일까? 고전들의 주장은 일치돼 있지 않고, 서로 정반대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 양쪽 주장이 모두 영원한 가치일 수 있을까? 그저 오래도록 읽힌다고 해서 신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비(非)진리를 오래도록 좋아할 능력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럼 고전의 가치란 내용의 '진리성'이 아닌, 문체의 우수성 같은 미(美)적 가치를 말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미는 진(眞)·선(善)과 상관이 없을까? 진·선과 상관없는 미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과연 참된 미라 할 수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서 기독인 고전 전문가들에게 한 수 배워 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다음은 루이스 카우언과 오스 기니스가 쓴 <고전(Invitation of the Classics)>의 일부분이다.
"우리 시대의 세속주의는 많은 현대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 메마르고 환원주의적인 이성(理性) 때문에 길을 잃은 우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거룩한 것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나 교회 이외의 어떤 것이 '중재자'로 나서 우리의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상상력과 마음을 부여해야 한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필두로 한 고전들을 제대로 만나면서 복음의 중심에 계시는 분의 광채를 볼 수 있었다. 주류 문화가 점점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보유한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놓쳐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거대한 보물의 숲과 같은 이 저작들이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기독교 고전'이 아니라 '일반 고전'이다. 그런데 고전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중재자'다? 마음이 완고해진 현대인들은 거룩한 것의 존재를 거부하니 '고전으로'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고전이 '믿음으로' 나아갈 상상력과 마음을 부여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언제 이런 중재자를 요구하셨는가? 성경 어디에서 고전으로 완고한 마음을 회복시키라 했는가? 기독인 전문가들의 고전 사용법이란 게 이런 식이었단 말인가?
존 번연(John Bunyan)의 말을 들어 보자.
"이렇게 반석과 같고, 금강석과 같고, 돌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상(傷)한 심령이 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불과 같이, 그리고 망치와 같이 마음을 부서뜨리고 녹일 때에만 그렇게 됩니다."('상한 심령으로 서라' 中)
굳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서뜨리는 것이지(렘 23:29), 고전으로 회복시키는 게 아니다. 새로운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고전> 저자들의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성모 마리아로 막아 세우던 로마가톨릭을 떠올리게 만든다. "성경을 읽으시려고요? 설교를 들으시려는 겁니까? 잠깐만요. 현대인들은 마음이 완고해서 곧바로 거룩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메마른 마음을 회복시켜 줄 고전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들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성경과 마찬가지로, 고전은 우리에게 권리주장을 하고 우리는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 고전은 우리의 신관(神觀), 가치관, 자기이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텍스트에 대해 질문하는 평론가인 동시에 우리의 가장 깊은 신념을 검토하라는 요구를 받는, 고전 작품이 벌이는 정밀조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도인 문화연구자는 '고전의 힘'과 '성경의 권위'를 혼동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위대한 고전은 인간의 통찰력이 최고치로 구현된 성과물일 뿐이다. 그렇지만 고전이 우리의 삶에 대해 묻는 질문들에는 '신(神)적 무게' 같은 것이 있다."
어째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됐을까? 이 저자들은 훈련된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 그런데, 고전의 질문에는 '신적 무게'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의 통찰력이 최고치로 구현된 성과물"에, 하나님의 계시를 멸시하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쌓아올린 생각더미에, 신적 무게 같은 것이 있다? '보통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인간적 탁월성에 압도될 수는 있겠으나, '신적 무게'라니! 상식적인 기독인의 독서라면, 뛰어난 재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계시를 억누르는 모습에서는(롬 1:21-23) 인간의 전적 타락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감탄과 실망을 오가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오직 은혜로구나!", "역시 인간에겐 구원이 필요하구나!" 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들은 어떻게 이런 사고(思考)에 이르게 됐을까? 필자는 짐작되는 바가 있다. 이는 사실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절대주의에서 상대주의로의 이동"으로 보는 기독인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엔 그래도 절대성은 부정하지 않았는데, 이젠 더욱 타락하여 절대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됐다" 고 본다. 그렇다면 상대주의는 절대주의보다 못하다는 것이고, 상대주의자를 절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좀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이 생각은 옳을까? 기독인은 절대진리를 믿기에 상대주의보다는 절대주의가 더 나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뺀 절대주의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절대주의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절대주의자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보다 더 나은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보다 하나님과(진리와) 더 가까운가? 소크라테스도 프로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시를 무시하고 자율적 이성(理性)으로 사고한 사람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나(잠 1:7) 소크라테스에게는 여호와 경외함이 없다. 지식의 근본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절대주의라는 표면만 보고 기독교적인 것이라 속단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은 진·선·미를 논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진·선·미이신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을 뺀 절대주의는 모두 비진리(非眞理)임을 알아야 한다. 그 끔찍했던 공산주의도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이슬람교는 또 어떤가? 기독인이 상대주의와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대주의의 반대편이 모두 우리편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휘운(독서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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