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년 전부터 왼쪽 발뒤꿈치에 통증이 느껴져서 계속 참아왔는데, 최근 들어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파서 가까운 동네 병원을 찾게 됐다. 엑스레이를 찍고 결과를 상담하러 의사와 면담을 했다. 면담하면서 바라본 유리창 너머 전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리 전망이 좋으냐고 했더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전망 좋은 진료실은 자기 방 밖에 없을 거라 자랑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페이스북에 실린 자기의 글을 소개했다.
[2]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눈의 일용할 양식
하늘을 보는 마음은
자신을 향한 간절한 열망
그리고...
신을 향한 감사의 기도..."
[3] 이런 내용들이 이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신앙인이냐고 물었다. 가톨릭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개신교라 밝히면서, 핸드폰으로 그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쳐서 친구 요청을 했다. 그 역시 친구 요청에 답을 해서 우린 순식간에 페친이 되었다. 환자와 의사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발생한 것이다. 간호사가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페이스북 안에 있는 다른 글들을 보여주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신부들이나 그 내부의 부패상 때문에 사실상 가톨릭을 떠났고,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고 말이다.
[4] 반가운 나머지 목사이자 신학교 교수라고 밝히자 페이스북의 다른 글을 보여줬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에 관한 글이었다.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웠다. 가톨릭에 실망한 내용의 글을 올린 가톨릭 신자 의사와 페북으로 교제하고픈 마음이 불쑥 생겨났다. 사실 의사와 환자는 몸 상태와 치료에 관한 필요한 얘기 외의 사적인 대화가 이뤄질 수 없는 관계 아니던가. 바로 다음 환자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인데, 내 몸의 상태와 치료과정에 대한 대화의 몇 배나 많은 시간을 사적인 얘기에 할애했다.
[5] 기다리는 다른 환자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지속해나갈 정도로 의사와 환자가 신앙적으로 하나가 된 매우 값진 시간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물리치료를 받은 후 학교 교수실로 와 페이스북에서 그의 글을 찾았다. 그가 나를 위해 자신의 페북 댓글에 남긴 블로그 주소로 들어갔다.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천주교도이지만 사실은
가톨릭이란 걸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로마, 나아가 유럽의 오욕의 역사와 함께
도도하게 흘러온 무시무시한 권위라고 생각한다.
2012년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어마어마한 돌기둥과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를 보며
느낀 것은 신앙심이나 그분의 영광이 아니었다.
그분의 영광을 등에 업은
인간들의 가여운 권위주의에 소름끼쳤다.
루터, 칼뱅 등의 종교개혁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그럼으로 해서 인류는 한 단계 더 올라섰다.
천주교, 기독교 하면서 논쟁하는 것은
털끝만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천한 인간만이 그분의 이름을 팔아
각자의 비루한 삶을 핑계대고 있을 뿐이다.
그분은 거기에 계시고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기도하는 곳이 바로
성당이고 교회라고 생각한다."
[6] 가톨릭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기에 너무도 기쁘고 반가웠다. 자신이 몸담고 있다 보면 자동 보호막이 쳐져 문제의식을 감지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천주교, 기독교 하면서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께 기도하는 곳이 성당이고 교회라고 생각한다’라고 했지만,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했고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호칭한다고 했다.
[7] 위의 글을 읽는 순간 그를 향한 사명감이 불쑥 생겨났다. 비록 모친 때문에 지금 가톨릭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지만 2/3 정도 개신교 신자가 다 된 듯 보였다. 그렇게 다 익은 고구마를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그간 기독교와 신자들의 모습이 가톨릭과 천주교인들보다 좋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중세 가톨릭의 부패상을 일방적으로 손가락질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차별화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8] 이런 처지에서, 사실상 가톨릭을 심적으로 떠난 이의 마음을 어떻게 기독교로 돌릴 수가 있을까? 그 순간 무디(D. L. Moody)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세상 사람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지만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사람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읽는다”란 말과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문장들이다.
[9] 자신이 소개하는 진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의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우리의 삶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이 배척당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그분의 백성다운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다져본다. 그래야 우리가 알고 경험한 진리만이 참 진리라 전할 명분도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 수많은 환자와 상담하느라 마음의 여유 없는 의사가 어찌해서 밖에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짧지 않은 시간 마음을 열어 처음 만난 환자에게 자기를 보여줄 생각을 했을까를 분석해봤다.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면서 그녀와의 영적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접촉점을 삼으신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1] 평소 전망 좋은 자신의 방에 대한 뿌듯함이 있었는데, 환자가 그의 자부심에 호기심을 가지며 먼저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랬다. 그게 평소 내 모습이기도 했다. 놀라운 건, 이후로 그와 내가 의사와 환자가 아닌 친구의 관계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당황할 정도로 의외의 대화 속에 둘이 빠져든 것이다. 내게 장점이 하나 있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내 마음을 다 오픈하고 상대를 대한다는 점이다.
[12] 그게 오해를 사게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어 깊게 교제하게 만드는 최상의 무기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읽는다"는 무디의 말이 새롭게 떠오른다. 나의 작은 마음씀이 내가 가르치고 전하는 말에 신뢰와 권위를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제나 참 진리 안에 사는 사람답게 오픈 된 마음을 갖고 잘 살아야겠다 재삼 다짐해본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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