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최악은 대비해야 합니다.“
저는 원래 호탕한 기질과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일 따위에 신경을 잘 쓰지도 않았습니다. 옷이 구겨지거나 옷에 뭐가 묻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제 큰 형님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아주 꼼꼼하고 까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였습니다. 밥 속에 머리카락이 있거나 밥 먹다가 돌을 몇 번을 씹어도 씹은 돌까지 맛있게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목회와 연관되는 일에는 아주 예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에 글을 쓴다든지, 설교 원고를 정리할 때는 성격이 보통 까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한국교회 생태계를 지키고 공적 사역을 하면서부터 불면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저 혼자 있는 저녁에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두하면 그 생각의 성에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극우적인 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지금 곧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공산화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서 끝까지 특정집회를 고집하거나 이어갑니다. 저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오지도 않은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어도 한국교회는 과연 얼마나 모일 것인가, 예배가 언제쯤, 얼마만큼 회복될 것인가.” 우리 새에덴교회나 걱정할 일이지,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지난주는 날밤을 새어가며 ‘포스트 코로나, 한국교회 미래’라는 책을 썼고, 돌아오는 월요일에 세미나까지 하겠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목요일 저녁에도 불면의 밤과 싸우는 중 갑자기 제가 쓴 ‘청연’이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밤새 잠 못 들며 그리움에 뒤척이다 / 홀로 일어나 걷는 새벽바다 / 발끝을 적시는 하얀 파도의 포말은 / 모래 해변에 써 놓은 너의 이름을 지우고 / 나의 그리움은 푸른 청연이 되어 / 파도에 쓸려 멀리 멀리 사라져가리 / 새벽녘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 (중략) … 잊으려 할수록 더 목마름이 되어 / 나를 온통 덮어버리는 당신 /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끈질긴 인연의 끈으로 / 마음까지 동여매는 그대 / 아, 그대와 나의 푸른 청연이여’
여기서 청연이라는 말은 ‘맑고 숭고한 인연 혹은 관계’라는 뜻입니다. 시란 시인이 쓰지만 이미 발표를 해버리면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저도 독자의 눈으로 그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저와 한국교회 공적사역은 청연의 관계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저의 걱정은 지나친 듯 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악을 대비하지 않는 사람은 앉아서 최악을 기다리는 상황을 맞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부질없는 걱정, 오지도 않은 내일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청연의 관계라면 지나치리만큼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악을 대비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저는 코로나 이후에 한국교회가 회복되는 미래를 놓고 걱정하고 또 걱정할 것입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 예장 합동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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