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 1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경동교회 원로 박종화 목사 ©기독일보 홍은혜 기자

한 창조주와 여러 피조물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 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 역할을 묻고 답하려면 신학적, 신앙 고백적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통합의 현장은 인간사회이며, 그 주인공은 인간이며, 사회와 인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는 창조된 인간과 세계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고, 이 참 좋은 인간세계의 모습을 “샬롬”(Shalom)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샬롬은 “인간세계의 평화와 정의 및 자연세계의 보전, 이 둘이 합쳐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갈등은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이거나 심지어 파괴시키는 죄악일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저주를 몰고 온다. 동시에 기독교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작업에 나서고 동참하는 것은 창조주가 선물로 주신 샬롬을 회복하라는 사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축복을 동반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앞에서 “책임지는” 결단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명이다.

둘째로는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의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으며, 인간사회는 이 형상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피조물끼리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통합은 그 형상의 회복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하신 이중의 사랑의 계명과 구조가 동일하다. “하나님 사랑”은 항상 “이웃 사랑”을 척도로 하며,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지향한다. 사회적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적 인간의 필수요인일 뿐만 아니라 “나 - 이웃”이 함께 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동으로 기쁨으로 누리는 축복이다.

셋째로는 갈등과 통합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마라.”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려는 파괴적 갈등은 거개가 갈등의 당사자 개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매도하거나 적대화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획일성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절대화요, 나아가 자신의 신격화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어느 이념이나 체제나 제도도 신일 수 없고 신격화될 수도 없다. 절대적인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의 형상을 지닌 다양한 인격체이다. 십계명 제1계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한 인권선언이고, 진정한 민주사회의 성서적 근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마라 – “중심”이 되라

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다 (잠언 2: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개혁판),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라”(표준 새 번역판).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가는 방향은 좌나 우가 아니다. 방향은 앞이다. 역사의 방향은 뒤도 좌도 우도 아닌 “앞”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앞”에 계시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로 움직인다.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실족하면 장애자가 된다. 중풍환자가 된다. 그러면 미래의 진로를 막는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예컨대 “선진 자유 민주사회, 선진 공정 복지사회, 선진 문화예술시대, 민족 통일과 평화시대”라는 우리 사회 미래의 비전을 공유케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라고 확신하며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두 팔과 다리 중 한쪽으로 빗나거나 치우치면 중풍환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장애사회요 중풍환자 사회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좀먹는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념갈등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신앙화로 치달아 신의 이미지도 이념화 시키는 과오를 즐겨 범하고 있기도 하다.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자기편이 아니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진영논리를 생성해 낸다.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증오를 신념화 한다. 또 하나 극단주의는 절대적 “자기 의”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경고하는 정치적 우상화 내지는 우상체제로의 일탈을 몰고 온다. 기독교 신앙의 공헌은 종교적 우상화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우상화,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우상화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십계명 정신에 따라 모든 피조물의 “평등한 자유 민주체제”를 강조하며 그 모범적 실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바탕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일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의 중립이란 결과적으로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에 기생하는 편파적 태도일 뿐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거부하거나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무작위 범죄”에 속하는 잘못이다. 중심에 서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정당한 자의 편을 들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꾀를 부려 갈등에 개입도 안하고 무감각한 구경꾼이 취하는 “중간”도 아니다. 중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쌍방이 너 죽고 나죽는 공멸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상생의 광장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생의 광장을 제공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장적 사명”이다. 편의상 진보적인 예언자적 사명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제사장적 사명은 갈등을 정당하게 해소하거나 또는 상생의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상호보완적 사명이다. 건강한 몸의 양 팔 내지 양 다리의 상보적 역할과 같다. 이 상보적 사명과 역할의 핵심은 몸이라는 중심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의 삶의 기본가치를 담은 중심이요 규범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앞에서 언급한 “중심잡기”는 중신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결속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을 비유로 들어 말하자면 몸통은 하나이나 양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에 연결되어 사는 모든 지체는 다양하다. 몸통을 건강하게 구성하는 살아있는 지체들은 부피나 크기도 다르다. 심장과 콩팥과 신장이 각기 다양하고 다르듯이 서로 성격도 다르다. 기능도 다양하다. 어느 하나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연대성에 산다. 어느 하나가 병에서 나으면 옴 몸이 기뻐하는 연대성으로 산다. 지체들이 다양하나 몸을 중심으로 서로 엮기며 통합된 모습으로 살기에 이를 “유기체적 통합”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는 다양한 은사가 만드는 아름다운 조화, 성서의 말씀대로 하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롬 8:28)과 같다. 건강한 유기체들의 조화와 화음을 음악의 용어를 빌어 필자는 몸의 “심포니”라 이름 하고 싶다. 심포니는 다양한 소리가 협력하여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화성 음악이다. 모든 소리가 각자 지닌 특유의 소리를 자유롭게 발성하되 화음을 이루는 발성이어야 한다. 발성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그래서 공동체적 자유이고, 자유로운 발성은 공공선을 이루는 화음의 발성이다.

이를 관현악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오케스트라”라고 할 것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

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

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갈등이 심각하여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최소한 그 갈등이 불치의 적대관계의 틀로 심화되지 않도록 갈등의 “평화적 관리”가 바람직하며, 이 일을 위해 특히 기독교 사회가 심혈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자료제공=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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