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당신이 선교사로서 아직 단 한 명도 예수를 믿지 않는 지역으로 파송받아 갔다고 가정하자. 그곳은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사회였다. 남자는 부인을 여러 명 두었는데,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회다. 당신은 복음을 먼저 전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잘못된 결혼 제도를 뜯어고칠 것인가?
조상 적부터 내려온 잘못된 결혼 풍습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결혼제도나 그들의 문화를 고친 후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자기의 전 인생을 투자해도 모자랄 것이다. 선교사라면 먼저 복음 전하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결혼 제도를 고치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 발생한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 중에 부인이 여러 명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부인들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 당신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인가?
만일 당신이 세례를 베푼다면, 당신은 그들의 잘못된 결혼 제도를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을 거부하는 꼴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이 되지 않는가? 처음 조선에 선교하러 온 선교사들도 이런 문제에 부딪혔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하였을까?
감리교 선교사들은 아주 빠르고 단호하게 결정하였다. NO! 절대 안 돼. 1895년 9월 감리교 연례회의는 '중혼자는 입교할 수 없고, 입교한 사람은 교인 자격을 박탈한다'고 하였다(옥성득, 14).
장로교 선교사들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1894년 12월에 시작된 논쟁은 1897년에 장로교 공의회에 가서야 일부다처자의 입교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옥성득, 15-21). 논쟁을 계속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1848~1926) 때문이었다.
1878년 서상륜은 홍삼을 팔려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가 열병에 걸려 죽을뻔했다(이숙, 150). 이때 만주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를 가까이 하던 의주 친구들 덕분에 서상륜은 영국 선교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치료받는 동안 매일같이 찾아온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로스 선교사와 함께 성경 번역을 하였다.
1882년 의주의 신자들이 성경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로스 선교사는 서상륜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영국 성서공회 한국 최초의 권서(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파송하였다(이숙, 152). 서상륜은 로스에게 받은 500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가지고 국경을 넘다 체포되었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고향인 소래로 와서 먼저 동생 서경조(한국 최초의 목사 중 한 명)를 전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883년 5월 16일부터 공식적으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소래교회가 탄생하였다(박용규, 363). 서상륜의 전도로 불과 몇 해 안 되어 58세대 중에서 50세대가 예수를 믿었다(민경배, 172).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국법으로 금하는 기독교를 믿었고,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하였으며, 마침내 세례 받기를 원했다. 세례 받기 위해서는 만주의 로스 선교사를 찾아가든가, 로스 선교사가 조선으로 와야 하는데 둘 다 가능성이 없었다. 서상륜은 서울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들떴다. 한걸음에 달려 서울에 도착한 때는 1886년 12월이었다. 추웠다. 그는 제중원을 찾아가 알렌 선교사를 만나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알렌은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의사행세를 하면서 세례 주는 것을 거절하였다. 왕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면서, 성도의 간절한 바람을 거절하는 알렌 선교사에 대하여 서상륜은 분노를 느꼈다(진지훈, 129-132).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는 세례 주기를 기뻐하였고, 서상륜은 세 사람을 데리고 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1887년 1월 23일이었다(진지훈, 133).
이후 언더우드는 소래로 내려와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다음 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정으로부터 지방 유람 공문을 받아 소래까지 직접 찾아와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서경조, 90). 서상륜은 소래교회를 세우고, 새문안교회를 창립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1890년 서상륜은 언더우드의 조사(안수받지 않은 토착인 목회자, 전도사)로 정식 임명받고, 이후 서울 정동교회에서 목회를 했다”(옥성득, 25). “그는 1888년 겨울 이후 매년 서울에서 열리는 신학반에 참석하여 목회자 교육을 받았다”(옥성득, 26). 1892년에는 베어드(W.M.Baird, 1862-1931) 선교사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초대 한국 장로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다. 누가 보아도 그는 한국 최초의 장로나 목사가 될 자격이 충분하였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중매 혼의 배필을 혼인 첫날 거절하고, 나중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함께 살았다(옥성득, 26). 당시 조선의 법은 소박맞은 첫 여인이 법적인 본처이고 사랑하는 여인은 첩이다.
1897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일부다처자의 입교를 금지하는 법을 정한 후 공의회는 서상륜의 입교를 취소하고, 조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지금 사는 부인과 이혼하고,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도 않았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법적인 본처와 결혼하라고 요구하였다. 서상륜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가 교회의 법을 따라 사랑하는 여인과 자식을 버리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하면,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될 수 있었다. 교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상륜은 교회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자녀를 택하였다.
새문안 교회 교우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서상륜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항의 서한을 만들어 북장로교 연환회에 제출하였다. 오랜 토의 끝에 공의회는 서상륜을 특별 예외 케이스로 구제하였다. 그러나 1904년 공의회는 다시 한번 일부다처자의 입교를 금지하는 5개 규칙을 발표하였다.
1907년 서울 승동교회 교우들은 서상륜을 장로로 선출하였다. 명백히 장로교 공의회 결정에 대한 도전이었다. 서울 노회위원회는 서상륜의 장로 피택을 거절하였고, 서상륜은 평생 평신도로 살았다(옥성득, 26-34).
복음이 문화와 부딪쳤을 때 선교사는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현재 선교사들이 마주하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당신이 선교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cf. 한국 교회사와 관련하여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은 2차 자료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1차 자료를 보지 않고 글을 썼기에 소설이나 영웅적 미담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서경조의 글도 회고담인데 년도가 틀린 부분이 있다.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1차 자료의 발간이 시급하다. 이 일을 위하여 옥성득 교수가 힘을 쓰고 있으나 재정적으로나 인력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아쉬움이 크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참고도서]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년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년
옥성득, ‘“초기 한국교회의 일부다처제 논쟁,”한국기독교와 역사 16 (2002년 2월), 7-34.
이숙, “베어드와 경상남도를 여행하며 한국어를 가르친 서상륜,” 기독교사상 725 (2019년 5월), 150-161.
진지훈, “언더우드와 새문안교회,” 성경과 고고학, 88 (2016년), 128-154.
서경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신학지남 7권 4호 (1925년 10월) 8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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