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므로 사람은 도덕적으로 하나님을 닮게 마련이다.
특히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 되었다.
그런데 간교한 사탄은 뱀을 이용하여 이틈을 이용 하였다. 사탄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해 사탄의 간교한 질문에 유혹을 받은 하와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지 않은 내용까지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 하셨다고 대답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을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로 변경 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깍아 내린 것이다. 사탄은 간교하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라고 쐐기를 박는다. 오히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지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인 것이다. 결국 하와는 그 실과를 따먹었을 뿐 아니라 남편인 아담 까지도 범죄 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죄인이 된다. 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 놓게 된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로 내 버려두심으로 나타났고 그들의 열매는 21가지의 인간 타락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울은 2장에서 완전히 필봉을 바꾸어 비난의 화살을 남을 비방하는 자들에게로 돌린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 뿐 만 아니라 악을 그르다고 판단하는 자들도 불의 하다고 말하는 것 이다 . 본문에서 행악
자나 비난자도 동일한 하다 죄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1.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 분
남을 판단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 입장에서 잘 잘 못을 가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하는 사람은 대상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이야 하며 잘못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객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다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된 창조물이요 하나님 의 관점에서 볼때 우리는 모두 동등한 죄인들이다.
2. 판단하는 이도 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간음 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
(요8:7)바울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 이유로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고 책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판단하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면 예외 없이 똑같은 일을 한다.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 받는 사람이나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범죄 한 인간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다
.동네 커피숍에 가서 보니 불빛이 희미한 가운데 연인 끼리 대화를 나눈다. 희미한 불빛으로 상대방의 얼굴모습이 잘 보일리가 없다. 미운 것도 예쁘게 보일 것이 아닌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얼마나 바로 볼 수 있으며 판단하겠는가? 우리는 남을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네가 남을 판단하면서 살았다면 네가 똑같은 일을 할 때 너에게도 그 판단을 적 용 시키리라고 하신다.
남의 눈에 티는 잘 보지만 내 눈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의 눈에 티를 뽑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눈은 몸에서 가장 중요한 지체이다. 그런데 눈은 자기를 보지 못하지 않은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넓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법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결코 남을 비판 하거나 정죄 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음을 명심 하자.
주님은 네 눈 속의 들보 부터 뽑으라고 하신다.
3. 무엇을 판단 할 것인가?
1) 나 자신을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 하셨다 (눅 6:42)이와 같이 바울은 1장 18절 이하의 이방인의 죄를 지적한 후 유대인은 교만하여 이방인은 죄인이요 자기들은 의인으로 자처하고 이방인을 비난 하였던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 하시고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분이심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악 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시만 하 실 것 이다 (롬2:9)
당장에 심판 받기도 하고 (행5:1-10)
얼마 후에 심판 받기도 한다.
3년 후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 빼앗고 3년 후에 죽었다. (왕 상21:18)
어는 경우는 30년 후에도 심판을 받는다. 경상 감사 황인겸이 부임하여 인계받은 미 해결사건 중 하나가 부녀 살인 죄 였다. 그런데 친구의 고백으로 30년 후에 그 범인을 잡았다.
5대가 지난 후에 심판 받기도 한다. 이조 세조때 사육신과 공모 했던 김집이 배신하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등이 노량진 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후에 김질은 여러 관직을 거쳐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살았으나 5대가 지난 후 김질이 반란 사건으로 3족이 멸함을 당한 것을 역사는 전하여 진다
그 뿐인가 1천년 후에도 심판을 받기도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주님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많은 선교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성도들이 듣기 싫은 죄를 회개의 메시지는 듣기 힘든 상황이다.
신도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애에게 달고 구미에 맞는 것만 주는 경우와 같다. 구약 성서의 예레미아는 “이는 그들이 .선지자로 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편안하다. 하나 평강이 없다 (렘 6:13,14)라고 하면서 회개의 메시지가 없음을 한탄 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선포 하였다.
마음에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순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1절)
우리가 남의 판단하는 기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 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했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예수님도 이에 대해 경고 하 시기를 우리가 비판 했던 것으로 비판 받고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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