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1920년 4월 초, 순회 전도대원의 설교 책임자로 배편에 올라 부산에서 목포로 가던 중, 남해를 통과하면서 시를 썼다. 그는 남해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저녁에 1절을 짓고, 이튿날 새벽에 2절을 지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30년이 흐른 후 1950년 10월 13일 저녁 목포 근 해상 군용선상에서 북한 공산군이 물러가고 북진하는 중에 환도하는 피난민 성도들을 위한 예배 중에 설교의 마지막에 이 시(詩)를 낭독하고 과거를 회상했다. 박형룡의 시(詩) 가운데 꼭 1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시(詩)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시(詩)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소개하는 시(詩)는 ‘충무공(忠武公)’이고, 그다음은 ‘목포 감옥에서’이다.
충무공(忠武公)
진도 섬이 여기더냐 충무공(忠武公)이 그리워라
거북선 어디 가고 빈 물결만 출렁출렁
물 있고 그 배 없으니 눈물겨워 하노라
충무공 가신 뒤에 유수광음(流水光陰) 3백여 년
거북선 뜨던 물에 만국 수군 모였구나
오늘에 거북선 없어도 만국함대 여기 있네
두 번째로 소개할 시(詩)는 ‘목포 감옥에서’이다. 박형룡은 1920년 4월 9일, 당시 평양 숭실 전문학교의 전도대원 중에 수석 연사로 발탁되어, 4월 7일 목포 양동 교회에서 ‘하늘의 칼’이란 제목으로 1,300명이 넘는 청중들 앞에서 뜨겁게 설교를 했다. 당시 목포의 인구가 15,000명이었으니, 10분의 1이 그 집회에 참석한 셈이다. 그의 설교는 일종의 전도 강연이었지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설교였다. 박형룡 박사는 ‘일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청중들에게 강연했다. 즉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일본은 반드시 심판과 징계를 받아 패망할 것이다’라는 메시지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던 시기에 박형룡은 대담한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박형룡은 목포 유달산에 올라가 종일 기도하고, 이튿날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아침 7시 20분경에 막 광주로 출발하려고 할 때, 박형룡은 목포 경찰서 박 형사에 의해 체포되어 유치장 2개월, 정식재판으로 감옥 8개월 도합 10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생활을 했었다. 그의 감방문에는 ‘보안법 위반자’라는 죄명이 붙어 있었고, 독립 만세를 부르다 잡혀 온 청년들과 한방에 한동안 있다가 다시 독방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썼다.
목포 감옥에서
유달산 해 기울어 석양이 된 때
목포부 연지동 20번지의
높은 담 철창 속에 들어 왔구나
성명은 변경하여 햐꾸욘쥬고(140호)
기호는 낮아져서 오마에르다
간수도 노 호령에 떨고 있으니
영어(囹圄) 중에 이 신세 가련 하고나
박형룡 박사는 신학자로서 개혁주의 교의학을 완성했고, 한국교회의 교부로서 수많은 강연과 설교를 해 왔다. 그는 소시적부터 탁월한 웅변술이 있었고,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또 중국 남경 금능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문필가이자 설교가이고, 시조 시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시조를 지어서 설교 끝에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하기도 했었다.
필자는 몇 해 전, 호남기독교회의 탯줄이라 할 수 있고, 호남에서 제일 큰 ‘목포 양동교회’를 직접 방문하였다.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목포 양동교회는 호남의 관문이자, 3·1운동의 거점이 되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만세운동에 앞장선 교회이기도 하다.
어느 의미로 보나 우리는 박형룡 박사를 자유대한민국의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애국자요, 위대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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