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기독일보 DB
탄핵 정국이 벌써 한 달 반이나 되었다. 어찌하다가 ‘계엄’보다 ‘탄핵’에 방점이 있게 되었다. 국회가 하도 탄핵을 많이 해서 대통령까지 탄핵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십 가지 탄핵은 모두 대통령을 탄핵해서 끌어 내리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해서 직무를 정지시키고 헌법재판소가 최종 심판하도록 한다는 시나리오였다.

나도 탄핵을 당해 봤다. 독자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정권(政權)이나 교권(敎權)이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엇비슷한 점이 있다. 정당이란, 정권을 잡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정권을 잡은 쪽은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수단 방법을 다 쓴다. 반대로 정권을 잃은 쪽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탈권을 하려고 똘똘 뭉치기도 한다. 각 기독교 교단도 총회가 있고, 총회 헌법이 있다. 총회도 국회 못지 않는 장면이 많았다. 국회가 정치의 현장이다 보니 삿대질, 육탄전, 욕설, 싸움박질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 선진화법이 생기고 다소 나아지긴 해도 말도 안되는 말, 욕지거리, 비꼬기, 개무시하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거지로, 숫자로 밀어붙여 행정부를 마비시키고 대통령을 끌어내기 위해 상식도 법도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기에 드디어 2030이 깨어나고, 그동안 중도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나의 경험을 소개하려고 한다. 지금부터 40년 전 필자가 총장 재임 시의 사건이다. 필자는 한 텀을 마치고 재임해서 두 텀 째 절반되는 시기였다. 그 당시 총회의 정치 판도가 뒤집혀 졌다. 10여 년간 교정을 하던 팀이 물러가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정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은 역시 학교였다. 학교를 누가 또는 어느 쪽에서 장악하는가에 따라서 역사가 달라지고 총회의 판도가 달라지던 시기였다. 교권이 바뀌자 총회는 이른바 ‘조사 전권 처리 위원회’를 만들어서 초법적으로 모든 기관을 접수하려고 했다. 위원회는 나를 소환했다. 15명의 위원 중에는 장로로서 전직 헌병 대장도 있었고, 범죄 수사대 수사관도 있었다. 그들은 내 앞에 녹음기를 들이대고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들은 내 말에 조금이라도 약점이나 문제가 있으면 꼬투리를 잡아 나를 몰아내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나 총회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에 그냥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조사 전권 처리 위원회’는 묘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을 만들었다. 총장은 학교 직인만 갖고, 재정 결재, 인사 결재 등 모든 것은 그들이 추천하는 새로운 총장이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운전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새로운 집행부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직감했다. 그래서 터벅터벅 걸어서 총장실에 도착해 보니 비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재판도 없어졌다. 위원회는 나를 ‘식물 총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누구 하나 보고하는 직원도, 교수들도 없었고, 방문객도 없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총장실을 들락거리던 교무처장도, 학생처장도, 총무처장도 오지를 않았다. 물론 교수들 그 누구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했고, 열심히 6년 동안 학교의 기관장으로 일했지만, 그것은 모두가 허상이었고 한순간에 모든 교수와 직원들은 새로운 교권에 붙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그 시기에 아무도 입술로라도 위로하는 자가 없었고, 전화 한 통화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총장실에서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것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고립무원한 감옥과도 같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배신감과 고독감, 그리고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몸에 이상이 왔다. 갑자기 심장이 급하게 뛰고 꼭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몰려 왔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여기저기 말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시는 외부와 소통하려면 학교 교환수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옥 같은 총장실에서 몇 달을 버티니 몸은 망가질 때로 망가졌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니 계기 상으로는 아무 일이 없다고만 하니 더욱 답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새 집행부의 공작으로 어느 날 갑자기 ‘탄핵’ 당한 일로 마음의 병을 얻었던 것이다. 그 후 5개월의 세월이 흐른 후에 어느 목회자가 교육부에 나의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속한 시일 안에 시정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올렸다. 교육부는 그것을 검토한 후에 학교에 ‘전통문’을 내려 보내왔다. 즉 “귀교는 현 이사장과 이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 이사들이 모여 대학의 총장을 탄핵하고 무력하게 했다. 그러니 일주일 안으로 이를 즉각 시정하고 총장을 원대 복귀시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새 집행부는 교육부의 전통에 깜짝 놀라 즉시 총장을 원대 복귀하였다. 나에게 빼앗았던 관용차와 운전기사가 다시 돌아왔고, 비서도 돌아오고 인사, 재정 결재판도 책상 앞에 돌아와 있었다. 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그로인한 상처가 너무나 컸었다. 얼마 후 나는 졸업장 수여와 졸업자에게 드리는 훈사를 했다.

나도 탄핵을 당해 본 자다. 나는 억울하게 불법으로 탄핵을 받아 감옥 같은 자리에서 여러 달을 보냈던 고통을 4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정치꾼들이 꾸며낸 내란 선동으로, ‘탄핵’을 당해 고생하고 있는 대통령이 문득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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