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밥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교는 생식이 아니다. 재료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재료(본문)를 가지고 삶고 끓이고 튀기고 양념으로 간을 해서 식탁에 앉은 가족(성도)들에게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사가 말씀의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요리(묵상하고 고뇌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한 말씀은 성도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맛을 안다. 설교의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설교학 박사가 있느냐, 언변이 탁월하냐가 아니다. 그 근본적인 차이를 내는 것은 바로 준비에 있다. 하수는 닥치면 닥치는 대로 늘 마감시간에 쫓겨 설교를 준비하고 평생 도망자의 신세로 목회를 마감한다. 그런데 고수는 다르다. 고수는 설교의 멱살을 잡고 간다. 설교의 멱살을 잡고 간다는 말이 무엇인가? 설교 준비에 대한 시간이 늘 고정적으로 확보되어 있고 충분한 묵상과 연구를 통하여 양질의 설교를 주도적으로 재생산해 낸다.
박정엽 – 설교가 맛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프고 곤란하게 만드시는 것 같고 실패처럼 보이는 수를 두시면 우리는 절망하고 불평한다. 나의 수준 낮은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수가 무능하게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한 수’다. 느림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지만, 그 느림의 시간 가운데 영적인 뿌리가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다. 아무런 준비와 계획 없이 영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미래를 맞이하는 안일한 느림은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느림은 슬프고 비통하다. 뿌리내리는 인내와 노력 없이 무작정 소망이 있다고 착각하며 “조금 있으면 대박이 난다”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고난과 고생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축복과 영광을 준비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과 고생은 축복과 영광을 선물해주시기 위한 밑작업인 것이다.
안호성 – 버티고 견디고 살아내라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와 같은 독립된 시문학이 없다. 그러나 복음서, 서신,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찬양, 칭송의 노래, 슬픔의 노래 등 다양한 운문의 시구가 등장한다. 시편의 어원 ‘Psalm’에 내제된 찬미는 신약으로 이어진다. 그리스어 명사 ‘hymnos’(칭송의 노래)에 연원하는 찬가는 신약의 가장 중요한 운문형식이다. 누가복음 서두에 나오는 마리아 찬송가 사가랴 예언은 복음서에 나오는 대표적 찬가이다. 빌립보서 2장 6-11절과 골로새서 1장 15-20절을 구성하는 ‘그리스도 찬가’는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운문의 범례이다. 윈시기독교 찬양에 근거하는 두 찬가는 사도 바울의 문학적, 시적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위공 – 성서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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