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훈 박사(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가 19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55회 창조론온라인포럼에서 ‘한국 창조론 운동에 대한 개인적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날 강연 내용은 상당수 양승훈 박사의 저서 「과학사와 과학철학」(SFC, 2022) 11장의 내용을 근거로 했다.
양 박사는 먼저, 창조론 운동의 선구자에 대해 “창조과학 운동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진화론에 대한 반박과 창조에 대한 과학적 변증으로부터 출발했다. 미국 창조과학연구소 설립자이자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는 1984년에 「현대 창조론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했고, 이 책에서 창조과학의 부활이야말로 20세기 말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고 했다.
이어 “위스콘신 대학 과학사학자인 넘버스(Ronald L. Numbers, 1942~2023)는 1992년 「창조론자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20세기 후반 북미주에서 출발한 창조과학 운동이 어떻게 오세아니아, 유럽, 아시아를 지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는지를 자세히 추적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창조과학 운동은 1981년 1월 31일,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창조과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해외의 창조론 논쟁은 일부 한국 교계의 식자들·선교사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이들은 후에 한국에서 창조론 운동의 전성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숭전대(현 한남대) 화학과 교수 계의돈(Robert Louis Goettw, 1929~2015)과 당시 건국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쥬영흠(Yeong-Heum Jyoo, 1934~2019)이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에서 창조론 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것은 1980년 8월 11~15일까지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80 세계복음화대성회’였다”며 “이 대규모 기독교 부흥회 기간 중 8월 12~15일가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12개의 분야별 위성집회가 열렸는데, 그 중 하나가 CCC 정동 채플에서 열린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였다. 다른 위성집회들과 달리 구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린 유일한 세미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때 참석한 사람이 ICR 설립자이자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 텍사스 A&M 대학교수 월터 브래들리(Water L. Bradley, 1943~)ICR 부소장 듀앤기쉬(Duane T. Gish, 1921~2013) 그리고 국내강사로는 유일하게 당시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현 KAIST) 재료공학과 교수였던 김영길(1939~2019) 등”이라며 “이 세미나에 연인원 4천여 명이 참석했고, 이로인해 8월 16일에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 본격적인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준비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양 박사는 “약 6개월간의 준비로 1981년 1월 31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며 “매스컴들은 한국 최고의 과학 엘리트들이 창조론을 주장하면서 진화론을 반대하는 조직적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도했고, 기독과학자들의 과학을 통한 창조론 전파는 학계의 주류 이론인 진화론에 대해 반박 못하던 교회나 선교회로부터 강연요청이 쇄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이때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를 비판하고 창조를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미국 ICR 중심의 창조과학자들로부터 제공 받은 것이었다”며 “초기 창조과학회 자도자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통해 급격히 회원 수가 증가했고, 쏟아지는 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다”고 했다.
더불어 “무엇보다 창조과학의 확산에는 80세계복음화대성회를 주관하고,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를 주최하고, 세미나 장소를 제공한 CCC의 역할이 있었다”며 “창조과학회는 초기 심영기, 양승훈, 이우상, 배용수, 조정일 박사 등 대표간사들의 헌신이 있었고, 특히 조덕영 박사의 취임으로 뉴스레터 ‘창조’를 정기적으로 발간했고, 내부적으로 조덕영 박사의 창조과학회 전성기를 여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국내 창조과학회의 사역이 급속히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한 또 하나의 요소는 곳곳에 설립된 지부들이였다”며 “가장 먼저 지부가 만들어진 곳은 많은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대덕연구단지였다”고 했다.
또한 “KAIST 교회 학생들은 창조과학 강사로서의 수고로 그치지 않고, ‘창조과학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었고, 회원수가 늘어나면서 ‘창조론연구회’(RACS)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래에 와서 RACS는 규모가 줄었지만 여전히 KAIST 교회 내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1992년 6월부터 1993년 5월 30일까지 창조과학회가 의뢰하여 한국기계연구원 산하 해사기술연구소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 해양기술운동성연구실장인 홍석원 박사팀의 ‘노아 방주의 안정성 연구’에 대해 설명했다. 양 박사는 “현실적으로 입증하기 힘든 가설 아래 연구가 수행되었지만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방주의 주요 치수가 우리가 가상할 수 있는 어느 경우에 비해 안정성 면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 결과는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이어서 양승훈 박사는 실패에 대한 부분도 언급했다. 양 박사는 “창조과학회 초기의 눈부신 성장에도 그늘이 없지는 않았다. 창조과학자들의 헌신과 열정적인 사역이 항상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며 “초기 창조과학회 사역들 중 가장 큰 좌절을 경험한 것은 과학교과서 개정과 창조과학교육관 건립이었다”고 했다.
이어 “한국에서의 창조론 운동은 처음부터 신학적 기초가 빈약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며 “일단 정회원 및 임원이 되려면 이공계 분야의 석사학위 이상을 소지해야 한다는 정관의 조항 때문에 신학자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고, 이공계 분야를 전공한 창조과학회 지도자들도 신학적 입장에 무관심했다. 이는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창조과학 운동이 진행된 탓이었다. 또한 대중강연과 외국문헌번역에 치중하다보니 창조론 연구는 신학과 과학 양쪽에 있어 침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창조과학에 대한 진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젊은지구론에 기초한 창조과학의 문제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깨닫게 된 것에는 먼저, 미국에서 대학원 학생으로 과학사(창조과학의 역사)와 신학 등 인문학 공부를 한 것과 둘째로 미국의 여러 복음주의 학자들과 교류한 것, 셋째로 VIEW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창조과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젊은지구론을 비롯해서 신학적, 성경해석학적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창조과학의 문제들이 체계적으로 드러난 것은 VIEW에서의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이다. 야외탐사를 하면서 여러 증거들을 수집했다”며 “신대원 강의를 통해 창조론 대강좌 시리즈를 저술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특히 “2003년에 우연히 프랑스 고생물학자이자 창조론자였던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1)의 다중격변모델을 만났다. 이로 인해 젊은지구론과 붙어 다녔던 단일격변설의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며 “서론격으로 출간한 저서가 「창조와 격변」이었다”고 했다.
양 박사는 “창조과학회의 내부 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조론 오픈 포럼’을 시작했다. 창조과학회의 침묵은 2007년 저와 조덕영 박사와 더불어 창조론 오픈 포럼이라는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며 “2007년 8월 13일 경기도 팔당 소재 분원초등학교 검천분교에서 처음 모인 오픈포럼의 목적은 창조론에 관심 있는 분들 간의 대화와 교제, 창조론 운동의 회고와 평가, 창조론 연구의 전망과 계획을 위한 모임을 목표로 한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포럼으로 전환했다”고 했다.
이어 “창조과학 운동이나 창조과학회가 어떻게 될 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창조과학은 상당 기간 동안 한국 목회자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조과학은 더 이상 해당 분야 과학계와 신학계에선 존재감이 없다”며 “또한 창조과학 운동이 전성기였던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불과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창조과학 운동은 조로(早老)의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끝으로 양 박사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에베소서 4장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했다. 아무리 참된 것을 말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리 사랑으로 행해도 참된 것, 즉 진리가 아닌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라고 해도 사랑이 없거든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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