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로잔대회가 22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회한 가운데, 이날 로잔 홈페이지에 ‘서울선언문’ 전문이 게재됐다. 대회 주최 측은 당초 이 선언문에 대해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의 공식적인 내용 및 방향성”이라며 공개 사실을 알렸지만, 이튿날인 23일 “서울선언문은 대회 마지막 날 공개 예정”이라며 “어제(22일) 실무자의 실수로 홈페이지에 공개된 것 같다”고 밝혔다. 로잔 홈페이지에 공개했었던 서울선언문 전문도 비공개 처리했다. 그러다 이날 오후 “제공된 텍스트에 대한 추가 검토 후 번역이 업데이트 될 수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는 단서와 함께 전문을 재공개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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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제자도: 거룩함과 선교에 대한 우리의 소명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지난 반세기 동안 로잔운동을 통해 전 세계 미전도 종족과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고 불의와 억압과 차별에 맞서 사회적 관심을 심어 주기 위해 역사하셨다. 이러한 이중 강조점(dual emphases)은 종종 ‘통전적 선교'(intergral mission)라는 개념 안에 통합되었지만, 통전적 선교는 제자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과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위임을 항상 완전히 통합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삶의 본을 따라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데 종종 실패했다. 그 결과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에서 잘못된 재정 관리, 성추행과 학대, 지도자들의 권력 남용, 이러한 실패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면서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 그리고 영적 빈혈과 미성숙에 대한 보고가 꾸준히 이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실패를 슬퍼하며 우리의 죄를 탄식한다. 또한, 우리는 겸손히 회개하며 우리 안에 주님을 볼 수 있는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복음의 지속적인 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한다(히 12:14).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확언에 따라 우리를 헌신한다.

제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위해 복음으로 형성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다.

우리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부활, 승천의 좋은 소식에 부합한 삶의 본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 아래 살도록 은혜롭게 능력을 주셨음을 확언한다. 그 결과, 선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한마음으로 연합된 제자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는 하나님의 사역, 즉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세상에 생명과 빛을 전하는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하나이며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역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적 성취의 구현으로서 지역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추구하는 선교의 수단이자 목적이다(렘 31:31-34; 마 22:36-40).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가 되라고 명령하시며, 제자 삼으라고 위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위임, 즉 하나님이 반역적이고 깨어진 세상에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일을 선포함으로써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 제자로 살아야 하며, 우리의 선교의 올바른 목표는 좋은 소식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친 모든 것에 순종하는 제자로 살기 위한 변화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인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고, 이를 통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신다. 인류를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는 모든 시대와 장소,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온 하나님 백성이 하늘에 모인 것을 드러내는 지역 교회이다. 따라서 복음의 형성적 능력은 개인과 지역 교회 모두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성숙한 제자의 형성은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신자 개개인의 사역을 통해 충만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마 22:37-40; 28:18-20; 엡 4:11-14).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고서 제자 삼을 수 없으며, 깨어진 세상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서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제자로 형성된 사람들이 가족, 이웃, 학교, 일터, 그리고 사회에서 불의와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깊이 관여하게 될 것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선교에서 우리의 과업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 고백을 확보하기 위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복음 전도 과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삶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제자가 되는 것과 제자 삼는 것에서 분리될 수 없듯이, 개인 생활, 가정,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복음 선포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제자로서 복음의 은혜를 처음 경험하는 동시에 계속하여 경험하면서 변화를 경험한다.

우리는 제자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된 사람임을 확언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시작된다. 그러나 좋은 토양에 심긴 씨앗처럼, 복음은 단번에 온전한 변화를 가져오거나 변화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는 일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거룩함과 사랑의 증가가 복음의 변혁적 능력의 실제를 보여준다. 변화의 초기 경험과 지속적인 실현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연합하기 위해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다.

지역교회는 복음 안에서 은혜의 수단을 실행하고 공동체의 삶에서 변혁적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제자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지역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삶의 형태를 공동체 생활에 반영하도록 노력할 때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확언한다. 교회는 복음 선포를 통해, 정기적인 세례와 주님의 만찬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기도와 찬양으로 복음에 감사하게 응답하는 것을 통해 그렇게 한다. 교회 안에서 신자 개개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동료 신자들에게 전달하므로 천국 시민으로서 그 시민권에 합당한 삶을 사는 법을 배운다. 교회 안에서 개인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간에 사랑의 연합과 일치한다. 교회 안에서 각 가정은 신앙의 가정생활을 영위하므로 주님의 방식으로 강화된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와 신자 모두 가장 거룩한 신앙으로 세워지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거룩함과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정결한 소망의 삶을 살도록 고무된다. 교회 안에서 복음 사역을 통해 준비되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본을 통해 고무된 우리는 삶 전체를 예배로 보고, 교회 밖 사람들의 선을 구하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세상의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법을 배운다(엡 2:19, 빌 3:20, 살전 2:12, 유다 20, 요일 3:3).

또한, 지역교회는 사역 지도자, 선교사, 그리고 동역자들에게 책무를 제공하고 건강한 리더십과 거버넌스 형태를 모델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사역자와 선교사들에게 지역 교회와 중요한 교제를 유지하고, 지역 교회에 대한 책무를 다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모든 제자에게 해당되지만, 지역 교회 밖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지역 교회 안에서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반영해야 한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지역 교회와 협력하여 자신의 백성을 제자 삼고 훈련하기(sharpen and equip) 위해 사역과 선교의 동반자 협력(partnership)을 일으키셨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의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하시는 새로운 인류의 구현으로서 지역 교회에 분명한 초점을 맞추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언한다. 이러한 사역은 책무, 투명성, 그리고 감독의 형태와 원칙을 위해 성경에서 지역 교회에 주어진 가르침을 따를 때, 그리스도를 높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한 개인보다는 복음 안에서 영적 권위의 위치를 보존하는 다수 리더십과 거버넌스 구조를 채택할 수 있다[3](행 6:1-6; 15:1-35; 20:17-38).

VI. 열방의 가족: 우리가 인식하고 그들의 평화를 위해 섬기는 분쟁 중인 민족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하나님과 개인 간과 개인과 민족 간에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백성은 평화의 사람으로 알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양한 민족이 공정하고 관대한 방식으로 각자의 은사와 지구의 자원을 공유하면서 번영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라는 성경의 일관된 요청을 구현한 기독교 공동체와 개인의 많은 사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자신의 평판과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옹호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를 규정하는 특성으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존중해 온 것은 아니다. 교회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폭력을 옹호하고 전쟁을 조장하는 활동과 사업에 관여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이는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분쟁으로 찢어진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도록 부름 받은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그의 교회에 그리스도는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해 모든 민족을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확언한다.

로잔운동은 모든 민족, 나아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라는 좋은 소식을 문화적으로 다른 모든 민족이 들어야 한다는 인식 가운데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를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나라들(현대적 의미의 ‘국가’)이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는 날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개인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민족을 위해서도 이렇게 기도한다.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이 상호 간의 축복을 하는 관계로 화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개인의 마음이 변화되어 그들과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질 때만 성취될 수 있음을 확언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심각한 갈등이 약화되고, 소외된 공동체가 화해와 화합의 기회를 얻은 많은 상황을 함께 기뻐한다. 전 세계적인 분쟁 가운데 북아일랜드 분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apartheid), 르완다 대학살, 그리고 스리랑카 내전이 그 실례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교회, 기독교 단체,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분쟁 당사자들 간의 최상의 평화 조성자(frontline peacemakers)나 분쟁의 배후에서 협상과 영향력 중보기도를 통해 평화의 대의를 옹호하는 데 사용하셨음을 기뻐한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인종 간, 종교 간, 그리고 국제적 차원의 새로운 무력 분쟁과 전쟁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100건이 넘는 무력 분쟁 중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Russia-Ukraine war)과 가자지구의 전쟁(the war in Gaza)이 가장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시리아, 미얀마, 수단, 에티오피아의 심각한 분쟁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전 세계, 특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s)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비록 그런 지역의 분쟁이 대중적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주목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인명 손실과 미래 세대가 번영할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에 대한 막대한 파괴를 슬퍼한다.

우리는 계속하여 침묵하며 민족주의를 조장하거나 신학적 정당성이 결여된 갈등을 부당하게 지지함으로써 폭력을 규탄하고 제지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우리는 세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피할 수 있는 분쟁과 전쟁을 조장하고 단지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규탄한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이 초래한 엄청난 고통에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우리의 자원을 모으고 분쟁 지역 근처에 있는 교회와 인도주의 단체의 구호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전쟁 상황에 취약한 사람들을 섬길 것을 촉구한다. 또한, 우리는 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을 지원하고, 무고한 폭력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와 배상을 촉구함으로써 중재자(peacemakers)로 섬길 것을 약속한다.

역사상 다양한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폭력과 전쟁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잔혹한 상황에서도 예언자적 진실성과 용기를 가지고 말하기보다는 침묵을 지켰다. 이는 2010년 케이프타운 서약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파괴적인 인종 간 폭력과 억압의 상황에서 공모한 것과 그러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수 많은 교회가 통탄할 정도로 침묵한 것을 슬픔과 부끄러움 마음으로 인정한다. 그런 상황에는 인종주의와 흑인 노예제, 유대인 대학살, 인종 분리주의, ‘인종 청소,’ 기독교 종파 간 폭력, 원주민 학살, 정치 및 종족 간 폭력, 팔레스타인인의 고통, 카스트 제도의 억압, 그리고 부족 학살과 같은 역사와 유산이 포함된다.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 ‘기독교인들이 침묵, 무관심 또는 중립을 내세우거나 결함이 있는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악에 연루된 것에 대해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케이프타운 서약을 상기한다. 이러한 결함 있는 신학적 정당성의 대부분은 성경이 말하는 ‘나라’(nations)와 현대의 ‘민족 국가'(nation-state)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민족에 관해 성경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성경에서 나라는 느슨하게 정의된 영토에 대한 역사적 애착, 왕을 통해 국민에 대한 통치를 행사하는 신(또는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정체성이 형성된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민족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족 국가”(또는 현대적 의미의 “국가”)는 국경이 명확하게 구분된 영토와 그 안에 거주하는 개인과 민족에 대해 헌법이 정한 제도와 법률에 따라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치적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를 말한다. 대부분의 현대 민족 국가는 여러 민족, 즉 국적만이 아니라 민족, 인종, 출신 국가, 그리고 현대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다른 여러 형태의 복합적 정체성에서 집단 정체성을 도출하는 국경 내 집단을 통치한다. 정체성의 측면에서 볼 때,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이런 집단은 종종 현대 국가보다는 성경의 “나라”를 형성한 민족에 더 가깝다. 우리는 모든 현대 국가가 주권을 행사하는 개인과 민족은 물론 이웃 국가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자비로운 대우를 해야 한다는 신적 요구에 대해 책무가 있음을 확언한다.

성경 속의 민족들(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 이집트인, 시리아인)이 현대 국가들(예를 들어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이나 그 국가의 정치적 주권 아래 사는 민족(유대인,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콥트 교인, 드루즈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과 이름, 역사, 지리, 그리고 혈통으로 연관될 때, 기독교인들이 이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고 있다. 중동과 다른 지역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부당한 폭력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국제적 인도주의법 위반을 정당화하려는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복음보다는 국가를 바라본 것을 개탄한다. 이는 특히 민족주의(nationalism, 모든 국가는 단일한 국가 문화만을 가져야 하고 다른 국가는 없어야 한다는 신념)나 민족 국가주의(ethnonationalism, 모든 민족은 고유한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와 결합할 때 유감스러운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우리 세계의 큰 악이다. 우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슬프게도 민족주의와 민족 및 인종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주장에 연루되어 있음을 애통해한다. 이에 반대하여 우리는 어떤 현대 국가도 하나님의 구원 통치의 특별한 대리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전 세계에서 분쟁 중인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섬길 것을 헌신한다.

우리는 서울-인천에서 열리는 이 역사적인 대회를 위해 모이면서, 정치적으로 강제로 분단된 북한과 남한에 그리스도의 평화와 빛이 한반도와 그 국민에게 임하도록 기도할 것을 다짐한다. 이 부당한 분단과 수백만 민간인의 죽음과 트라우마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휴전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화해와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 속에서 불안정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남북한(Korea)과 남북한 국민이 하나가 되기를 계속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북쪽의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어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the great Pyongyang Revival of 1907)을 기억하며, 북한 정부의 기독교 형제자매들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 공동체, 그리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문을 여시고 다시 한번 북한에서 방해나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대히 선포되고 나타나서 한반도 전체가 주님을 알 수 있도록 세계 교회가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이 전쟁과 분쟁의 공포에 직면한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세계의 민족과 국가 가운데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자(peacemakers)로서 그리스도의 평화의 본을 보여주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믿고 선포하는 중요한 실천으로서 평화의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갈등으로 깊이 상처를 입은 세상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낼 수 있다.

VII. 기술: 우리가 분별하고 관리하는 가속적 혁신

기술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모든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전례 없이 빠르다. 늘 그러하듯이, 인간의 잠재력과 인간 행동에 대한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사회와 지구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 도덕적, 윤리적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현대의 여러 혁신은 인간과 기술의 결합 또는 인간이 기술의 지배에 종속될 수도 있는 집중적 환경(immersive environments)을 조성하는 데 적합하다. 이러한 잠재력은 유전공학, 복제, 생명공학, 마인드 업로드, 디지털 미디어, 가상현실, 그리고 인공 지능과 같은 분야에서 발생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기술 발전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청지기직을 알려준다. 성경적 지혜는 교회가 복음 전도와 제자도를 가속화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창의성과 혁신의 열매를 포용하고 관리할 때도 신흥 기술의 도덕적, 윤리적 함의에 관하여 분별력 있고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다.

기술적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창조성을 반영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과 생산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뿐 아니라 발명과 혁신의 지식과 과정, 그리고 나아가 기술 개발과 활용에 의해 형성된 문화를 언급한다. 인간의 창의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 혁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술적인 존재, 즉 인간의 번영을 촉진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돌볼 수 있도록 세상을 재구성하는 존재로 창조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기술은 창조주가 모든 인간을 부르신 일과 직업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 활동은 특정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으로써 이웃과 세상을 돌보고 우리의 창조적 능력으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죄는 기술의 사용과 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죄가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므로 죄의 영향은 기술의 사용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혁신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 개발과 사용이 즉각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인간의 번영과 자연 세계에 대한 돌봄을 방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술 혁신은 종종 깊은 불안감, 잘못된 의존과 집중,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해로운 조작, 거짓 안정감, 또는 비인간적인 표현을 야기하기도 한다. 죄의 영향으로 인해 기술은 종종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숭배함으로써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다(롬 1:25).

최근 많은 혁신으로 인해 우리 삶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훨씬 광범위하게 기술 발전 양상이 나타났다. 기술은 우리의 집중적 환경이 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도록 만든다. 모든 기술 개발과 적용은 가치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형성되며, 그중 많은 부분이 참되고 고귀하며 칭찬받을 만한 것에 적극적으로 집중하라는 성경의 권고와 상반된다(행 17:28; 빌 4:8).

기독교인은 기술을 예언자적으로 비판하고 관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미디어 기술로 인해 사람들이 쉽게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증대했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가운데 항상 “은밀하고 부끄러운 방법을 포기”하거나 청중을 속이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려는 유혹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통해한다. 대신,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우선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나누며 그들의 삶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언해야 한다. 그런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사용은 공유되는 복음에서 발견되는 진실성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후 4:2).

우리는 많은 기독교인, 특히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시간이 불균형적으로 많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들을 “추종하고”(discipled) 있음을 인식한다. 또한,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교회 성장과 복음 전도의 목적을 위해 종종 적용되어 왔지만, 제자 훈련을 위한 노력은 뒤처졌음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이 디지털 시대의 기술을 제자 훈련에 활용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디지털 공간에서 신실한 현존, 연결된 기기를 통한 신실한 상황화, 신실한 디지털 문해교육, 그리고 건전한 사용 습관 형성을 위한 신실한 환대의 실천을 요청한다.

기독교인은 자연이나 인간 본성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기반하여 기술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인간과 생명의 구성 요소를 재구성하는 인간 능력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윤리적 사용과 장기적 영향에 관해 매우 실제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유전자 기술을 신중하게 분별할 것을 요청한다. 복잡한 의학적 문제를 다루는 유전자 치료의 잠재력은 엄청나지만, 이러한 기술 적용에는 중요한 질문이 따른다. 우리는 유전자 산물로 전락할 것인가? 유전 가능한 유전자 변형의 함의는 무엇인가? 우리 인간성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유전자 조합과 연관되어 있으며, 만일 우리가 유전자 조합에서 벗어나 재구성될 경우 어떤 함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굴복과 그러한 기술 접근 및 기존의 차별 형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에 관한 추가적인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보다 중요한 방식으로 우리가 직면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분별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분명히 인간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추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시스템의 발전은 인간의 창의성과 합리성의 유일성과 관련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인공지능은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인공지능이 인류와 더 넓은 세계에 실존적 위협이 될 것인가? 인공지능이 일터와 인간의 업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정부와 다른 기관들이 감시 및 보안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인공지능의 혁신이 가속화됨에 따라, 우리는 기독교인, 특히 이 산업에 종사하는 기독교인들이 안전하고 공평하며 존엄한 적용을 촉진함으로써 창조주와 인간의 창조성을 존중하는 이 기술의 개발과 사용에 관여할 것을 요청한다.

기독교인은 기술을 신실하게 관리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랑과 정의와 신실함으로 기술을 혁신하고 사용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기술이 인간이 살아가고, 놀며, 관계를 맺고, 일하는 환경은 물론 기독교인들이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나누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기술 개발과 사용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더욱 온전히 직시하며 이웃과 원수의 복지를 추구하고 인간의 번영과 존엄성을 증진해야 한다(미 6:8; 눅 10:25-37; 창 9:6; 약 3:9; 창 1:31; 계 21:1-8).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디지털 기술이 논의되고 적용됨에 따라, 우리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형성된 기존 교회의 실천과 함께 새로운 교회의 실천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 교회는 디지털 기술이 단일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분별력을 발휘하여 다양한 기술을 언제, 어떻게, 어디에 도입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며, 항상 그 사용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고 존중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분열을 해소하며,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기독교 제자도 사역을 위해 디지털 기술을 탐구하고 적용할 것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술 적응력을 높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로 연결된 교회의 복음 전도 활동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기술이 이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세계 여러 지역으로 복음의 범위를 넓히고, 성경 번역 사역을 촉진하며, 전 세계 하나님 백성의 이동과 사역을 촉진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기술적으로 진보되는 세상에서 복음으로 동기를 부여받은 신실한 기술의 청지기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언하는 새로운 세대를 돕게 되기를 기도한다[4]

결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만유의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선교라는 고귀하고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제4차 로잔대회를 위해 대한민국 인천에 모였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에서 돌이켜 죄 용서를 통해 새 생명의 선물을 받도록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해하여 거룩한 한 백성을 이루려는 목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복음으로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구원의 통치 아래 누리는 자유를 기뻐한다. 우리는 복음으로 제자 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대의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 자원, 에너지,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로 인한 모든 열매가 그분의 은혜의 성취임을 겸손히 고백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라고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좋은 소식으로 절정에 이르는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고, 그분이 만물의 주님이심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우리의 생명을 드리라는 그분의 부름을 듣는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을 충실히 해석하는 사람이 되라는 그분의 부름을 듣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유일한 가시적 표현인 지역 교회, 즉 모든 장소와 시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형성된 선택된 백성으로서 지역 교회에 대한 새로운 헌신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부름을 듣는다. 우리는 삶으로 진리를 증거한 남성과 여성에 의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 사도적 신앙의 새롭고 오래된 도전에 직면하여 신실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부름을 듣는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따른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이기적인 야망을 버리고, 복음의 동역자로 일하며, 그분의 영과 그분의 뜻과 길과 말씀에 대한 지식을 기도로 의지하는 가운데 매일 성장하면서 새로운 헌신으로 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섬기는 자리로 돌아간다. 우리가 홀로 세상의 소망과 빛 되시는 분의 탁월함을 한 목소리로 선포하자.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한 마음으로 나타내자. 우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오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 See the Lausanne Occasional Paper 74, “‘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Toward a Faithful Evangelical Hermeneutic of Scripture,” https://lausanne.org/occasional-paper/do-you-understand-what-you-are-reading-toward-a-faithful-evangelical-hermeneutic-of-scripture.

2. See the Lausanne Occasional Paper 77, “A Theology of the Human Person,” https://lausanne.org/occasional-paper/a-theology-of-the-human-person.

3. See the Lausanne Occasional Paper 75, “The Formation of Disciples for Mission and the Formation of Disciples as Mission,” https://lausanne.org/occasional-paper/the-formation-of-disciples-for-mission-and-the-formation-of-disciples-as-mission.

4. See the Lausanne Occasional Paper 76, “Christian Faith and Technology,” https://lausanne.org/occasional-paper/christian-faith-and-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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