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인간군상들을 살펴보면 oo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또, oo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자세(Life Attitude)로서 역사를 세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역사를 허무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듯이, 이와 유사하게 oo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oo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가 이런 어법을 썼다. 그는 독일의 법률가, 정치 행정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회학자였다. 막스 베버 하면 우선 유럽 자본주의와 경제가 발전하는데 기독교 윤리가 있었다는 것을 주장한 학자라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서구는 왜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동양은 그렇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전적으로 다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치, 행정, 경제, 종교사회학에 큰 영향을 끼친 논문으로 지금까지의 세계역사에서 가장 우수한 논문 100편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쨌든, 막스 베버는 정치 행정학자로서 정치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말했는데, 정치를 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에 의해 정치하는 사람들(정치꾼)이 있다 하였다. 정치를 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할 것도 없이 헌신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목적과 대상이 뚜렸하며, 이를 위해 능동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헌신적으로 희생한다. “정의를 위해서” 또는 “대의를 위해서”와 같이 목적이 뚜렸하고, 이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자세는 헌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oo에 의한 타입(Type)은 매우 타의적이며 수동적인 입장이다. 이 입장도 우리사회에 필요하긴 하다. 어떤 정치적 상황이나 환경에서 의무나 책임성 같은 것이 제기될 때 누군가는 그 조건을 실현하거나, 의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정치가는 “oo에 의한 정치”를 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정치나 조직사회에서 누구에 의한 정치는 약한 의지력으로 인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 못한다. 그것은 헌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의해 자신의 의지력을 행사하려다 보니 불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책임을 빠르게 집어 던지는 경우가 있다. 베버 시대의 독일을 예로 든다면, 그 시기 독일은 정치조직 기구나 정신 가치면에서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소위 지성인 사회의 중심부류인 대학의 교수들 조차도 교육 이념이나, 진리수호의 헌신과 희생이 아닌, 당시 정치력에 의해 움직여 스스로 자신들의 주권이나 권리를 무력화하는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성경에도 “예수를 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 예수에 의한 사람“이 있다. 마르다나 마리아 같은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정성을 희생적으로 모든 것을 바친 인물들이다. 즉, 구원할 자, 그리스도의 사명완수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이 두 자매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위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쳤다. 예수님이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위해 정성스런 식사도 준비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의 그리스도 됨과 죽으심을 위해 자신들의 것을 모두 바친 사명자들이다.

구약의 예언자들 역시 “여호와를 위해 일한 자들”이었다. 예언자란 미래를 자의적으로 예단, 또는 진단하는 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를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할 사람을 부르셨는데, 불리움을 받은 자들이 바로 예언자들이다. 예언자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뜻이나 의지를 실현하도록 돕기 위한 삶, 또는 헌신적인 삶이 어찌 육신, 또는 정신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불행을 겪었다. 감시받고 미움을 받았으며,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 것을 잘 알 것이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말했다. 영광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지는 부, 명예, 또는 권리를 말한다. 천박한 말로 예수 때문에, 예수에 의하여 이름을 날리고,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는 자들을 말한다. 중세 카톨릭 교황은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속적 영광을 누렸는가. 지금도 예수에 의하여 부와 명예를 즐기고 사는 학자들, 목사들도 너무 많다.

반면,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믿음을 위해 일했던 루터는 숫한 고난을 당했다. 틈만 나면 교황청에 불려가고, 협박을 받아 위험한 상황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결국 그런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개신교라는 새로운 기독교신앙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시대적 선이나 정의 실현 요구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분명 역사의 심부름꾼으로 가치가 있어 보이나, 자신의 번영과 이익추구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삶의 종말에서 부끄러움과 수치와 후회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헌신한 인물들(베드로, 바울, 루터, 칼빈, 웨슬리)은 하나님의 역사책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항아리를 깨트려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히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6:13).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의 본보기적 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은총을 전파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비록 거룩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산다 하더라도 사명감을 받아 나가 복음운동하는 삶을 살든가 해야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신이 영광받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예수를 위해 사는 사명자인가? 아니면 예수에 의해서 밥먹고 사는 자인가? 오늘 한국 개신교에 분봉왕 같은 제사장은 수없이 많으나 예언자를 찾아보기 드문 것은 ”위해서 사는 자“(one who lives for), 곧 사명자보다 ”의해서 사는 자“(one who lives by), 곧 직업으로 사는 자가 많다는 방증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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