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국칼빈학회 제3차 정례발표회가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소재 백석대 비전센터에서 ‘칼빈의 신앙과 성례’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류성민 박사(합동신대)가 ‘교회의 일치와 성찬 문제 - 비텐베르크 일치와 칼빈의 성찬론을 중심으로’ △박경수 박사(장신대)가 ‘성경적 인문주의자 올림피아 풀비아 모라타 - 올림피아와 라비니아의 대화를 중심으로’ △최민호 박사(아신대)가 ‘학성 한철하 박사의 「기독교강요」 해설 - 목회신학 관점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비텐베르크 일치와 한국 교회에 주는 역사적 교훈
먼저, 류성민 박사는 “1536년 비텐베르크 일치(Wittenberger Konkordie)는 그 중요성과 다른 신앙고백 문서들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연구에서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며 “오히려 성만찬 논쟁을 끝내지 못한 실패로 간주되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평가되기에 비텐베르크 일치에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들의 참여와 그들의 엄청난 수고가 담겨있다”고 했다.
류 박사는 “비텐베르크 일치는 일차적으로 루터파 제후들과 츠빙글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고지 독일의 도시들과 개혁파 스위스 칸톤들의 여러 일치 협상들 가운데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라며 “다만 이 논의에는 스위스의 취리히(Zürich), 베른(Bern), 바젤(Basel)은 이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고, 콘스탄츠(Konstanz)를 제외한 고지 독일 도시들만이 협상을 통해 루터파와 일치를 얻게 되었다. 물론 이 일치는 슈말칼덴 동맹의 가입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학적 결과도 낳았다. 성만찬에 대한 일치는 상호 간에 어려운 문제였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렀고, 모두의 승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문서들인 1540년 CAvar과 1578년 일치서에도 영향을 주었다”며 “특히 이 멜란히톤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정하게 했고, 그것이 그의 신학총론과 신앙고백에 반영되었다는 점은 후대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그리고 이 일치는 현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1973년 유럽의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의 로이엔베르크 일치(Leuenberg Concord)를 만들어 내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1536년 비텐베르크 일치는 정치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의 의미를 갖는다”며 “정치적인 면에서 비텐베르크 일치는 제국 내에서 커져가는 종교 전쟁의 위기감 가운데, 보호처를 찾고자 했던 개혁파 성향의 고지 독일 도시들이 비텐베르크의 루터파를 설득하여 개신교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에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어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의 부정적 결론을 벗어나 이제 정치적인 일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성찬 문제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하나의 형식을 추구하는 결론이 비텐베르크 일치였다”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성찬의 불일치 문제는 정치적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류 박사는 “신학적인 면에서 비텐베르크 일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마르부르크 회담을 통해 육체적 임재의 문제가 매우 핵심적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양측이 서로 강조하고 붙들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비텐베르크 일치의 협의를 통해 드러났다. 루터를 위시한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고지 독일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성만찬을 그냥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만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행사로 이해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찬을 그렇게 메마른 식사 정도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성만찬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영적 은혜를 부인하지 않았다”며 “특히 부쩌를 비롯한 고지 독일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찬을 통해 실제로 은혜로운 영적 만남이 있다고 고백한다”고 했다.
더불어 “1534년 카셀 회의에서 멜란히톤과 부쩌는 양측의 견해가 사실상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것을 기초로 1536년 비텐베르크에서 양측의 신학자들은 만났다”며 “물론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루터를 비롯한 비텐베르크는 개혁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멜란히톤의 새로운 신학총론에서 드러났고, 결정적으로 CAvar에서 비텐베르크 일치의 문구를 사용함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했다.
그는 “비텐베르크 일치의 신학적 쟁점을 크게 보면, 첫째,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빵과 함께’라는 방식으로 서로가 상호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양보가 되었다. 서로의 입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측은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에 실제로 임재 하신다는 정도의 합의로 충분하다고 여겼다”고 했다.
또 “둘째로 ‘무가치한 사람들의 먹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부분도 양측의 양보를 포함한 것”이라며 “부쩌가 현실에서 항상 부족한 신자들에 대한 표현으로 인식하여, 성만찬은 신자들에게만 허용된다고 생각한 반면, 루터는 신자가 아니라도 실제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신자가 아니라면 성만찬의 효과는 없다. 이 부분을 양측은 신학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결론내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비텐베르크 일치의 견해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부쩌의 성만찬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며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1536년 이미 성만찬의 영적 임재라는 요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성만찬 소논문에서 비텐베르크 일치의 연속선에서 양측을 하나로 묶기 위한 효과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터파에서 칼빈에 대해 호의적이었다는 점은 이런 부분에서 잘 이해가 된다”고 했다.
그는 “개신교회는 성만찬 교리로 분열되는 것 같았지만, 서로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년간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리고 비텐베르크 일치라는 결과물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며 “그리고 그 결과물은 칼빈을 위시한 개혁파 신학이 포괄할 수 있는 범주였다. 신학적으로 분명한 범주를 정하는 것과 함께, 서로의 입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만남과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아울러 “완전한 일치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1530년대 교회가 처한 상황을 보고, 적절한 협조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적절한 수준에서 신학적 합의점을 찾고, 협동했던 것은 이 시대 다양하게 갈라진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행동의 지혜를 줄 수 있다”며 “상호 모든 것을 일치하게 만들 수 없다 하더라도, 협력이 필요한 수준에서 동의하고 협조하는 것은 역사가 주는 지혜”라고 했다.
◇ 성경적 인문주의자 ‘올림피아아 모라타’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박경수 박사는 “올림피아는 페라라를 떠나 독일로 이주하면서 헤어진 친구 라비니아를 항상 그리워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속적으로 우정을 나누었다”며 “올림피아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슈바인푸르트의 전쟁 와중에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올림피아가 라비니아에게 보낸 편지 다섯 통과 라비니아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한 “올림피아는 슈바인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에 있을 때에도 라비니아에게 편지하여 신앙적 권면과 조언을 제공했다. 그리고 슈바인푸르트가 전쟁에 휩쓸려 고통을 받던 때에도, 올림피아는 라비니아에게 편지하여 자신과 가족이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소식을 전한다”며 “하지만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그분의 선한 손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피력한다”고 했다.
박 박사는 “편지에서 우리는 올림피아가 전쟁의 재난 가운데 생명을 위협받는 고통의 시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는 경건한 신앙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올림피아아 모라타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한 당대 최고의 고전학자요 인문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성경 연구에 매진한 성경학자이자 삶의 고난 속에서 경건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키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였다”며 “올림피아라는 한 사람 안에서 인문주의 전통과 종교개혁 전통이 하나로 합쳐져, ‘성경적 인문주의’로 융합되었다”고 했다.
◇ 학성의 목회신학적 칼뱅 해석의 함의
이어 마지막 세 번째로 발제한 최민호 박사는 “학성의 정교한 독법과 목회신학 관점에서의 「기독교강요」 이해는 칼뱅신학을 정확하게 해석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라며 “학성이 파악한 칼뱅의 경건론과 신앙론은 「강요」의 전체구조에 있어 천상과 지상,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는 경첩(hinge) 역할을 한다”고 했다.
최 박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경건 속에서만 바른 신지식을 갖게 되고, 천상의 신비를 보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일을 지상의 교회와 사역자를 통하여 이루시며, 모든 성도가 경건하게 되기를 바라셨다”며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 사건 등이 과거나 종말론적 완성을 설명하는 개념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그 유익을 칼뱅은 강조했다. 결국 현재의 현실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고양하고, 그리스도 통치의 능력과 영광까지 보게 했다”고 했다.
이어 “학성의 목회신학적 칼뱅 해석은 첫째, 칼뱅신학을 가장 칼뱅적으로 해석하는 한 모델이 된다. 칼뱅은 중세 신학의 번쇄적 사변성을 극복하고자 언제나 그 감미로운 열매에 집중했다”며 “학성은 칼뱅신학의 각 부분에서 유익과 결과를 명확하게 찾아 신자에게 신앙의 유익을 얻도록 인도하였다. 학성은 이 유익에 대해서 깊은 숙고를 통해 그 내용을 찾아냈고, 그 결과인 구원에 천착하여 「기독교강요」를 해석했다”고 했다.
그는 “둘째로 학성은 정교한 독법을 통해 「기독교강요」의 내면에 흐르는 사상과 지향점을 명확하게 규명했다”며 “경건론과 신앙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전체구조로써 종합했다. 칼뱅의 경건론은 그의 신학 전체를 아우르는 시작점과 목적이 되었다. 학성은 특히 칼뱅의 신앙의 목표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종교를 구속종교로 규정하며, 사역의 목표가 여기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고 했다.
또한 “셋째로 학성은 칼뱅의 교회론의 시작을 선택 교리에 두었다. 이로써 천상의 일과 지상의 일을 연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따라 칼뱅은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로 구분하고, 지상교회의 가치를 천상교회의 반영에 두었다. 지상교회의 불완전함에도, 천상교회를 지향하고 반영함으로 거룩한 교회라 할 수 있다”며 “학성은 이러한 교부를 계승한 칼뱅의 교회론에 따라 그 시작점을 신적 작정 교리와 연결했다. 이는 신적 작정의 지상에서의 구체적 실현을 전도로 본다. 그리고 칼뱅이 강조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가 결국 작정 교리의 목적적 실현임을 명확히 했다”고 했다.
이어 “넷째로 학성은 목회신학적 해석을 통해 과거 부활 사건과 그것의 종말론적 완성 사이의 긴장에서 현재의 의미를 강조했다. 즉,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를 지상교회와 연결되었음을 보았다”며 “또한 칼뱅이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으로 부활 능력과 영광까지 보여주셨음을 강조했다. 그의 부활로 인하여 지상의 성도는 새 생명과 중생의 의를 받았고, 부활의 실재를 보증받았다. 여기에 구원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이 자리한다”고 했다.
아울러 “다섯째로 신학자이자 교수였던 학성은 목회적 해석을 통해 목사와 교사(교수), 선교사 사역의 중요성을 칼뱅신학을 기초로 일깨웠다”며 “이 직분은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 성령의 구원 적용에 대한 가시적 활동을 보여준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 직분자를 통해 일하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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