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자신이 경배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경배 받기를 바라기는 했을까? 매 일요일마다 세계 각지의 교회와 성당에서는 예수에 대한 예배가 진행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는 어떤 마음이고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를 생각해본다. 예수보다 500년 정도 일찍 활동했던 공자는 자신의 사후 여러 번의 추존을 걸쳐 최종적으로 대성지성문성왕이라는 거창한 호칭으로 불려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살아생전 그는 사람들에게 ‘상갓집의 개’라고 모멸 찬 말을 들었는데 말이다. 물론 유학이 일반적인 종교와는 그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예배나 미사, 예불과 같은 방식으로 그를 존숭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예수와 공자 모두 사후에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그 제자들 그리고 또 그 제자들에 의해 그분들의 원초적인 가르침은 이른바 ‘신학화’되기 시작했고 그분들 자신은 그 가르침의 시조로서 혹은 신으로서 존숭되기 시작했다.
장동식 – 복음, 네가 곧 군자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통합적 도덕 질서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부활의 본질적 성격은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의 존재론적 실체가 부활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그렇게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실체이다. 예수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사건은 물리적으로 입증시킬 수 없다. 그 진실성은 오직 죽은 자들로부터 그가 부활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뿐이다. 빈 무덤 전승들처럼 그가 하나님이 다시 창조한 영적인 몸으로 그의 “현존”이 “능력과 가능성”과 결합하여 나사렛 예수의 통합된 몸과 영혼으로 나타난 것을 전제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 한 사람”으로 재창조하신 존재론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 한 사람”으로 재창조하신 존재론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부활은 집단 또는 공동체적 사건이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따르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의 부활의 존재론적 실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많음”의 실체인 것이다.
허먼 C. 웨이첸 – 하늘과 땅이 하나되게
그래서 전도자는 제 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헛됨을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허상이라는 걸 발견하고 실상을 바라며 나아가게 된다면, 헤벨 즉 헛됨은 우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길라잡이와 같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 헛됨은 ‘아름다운 헤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게 정말 행복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시도하는 행복은 수고에 따른 삯을 받는 것이지 은혜의 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고 이루신 일의 결과를 사람에게 조건 없이 선물로 허락하시는 것을 ‘좋다, 선하다, 아름답다’고 보시거든요. 성경은 이를 낙 또는 행복이라 말합니다.
오형천 –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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