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란 단어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어거스틴으로 알려진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그가 자유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변증론적 사고 방식이 신학의 바탕이 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의 신학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시도의 역사적 신호탄이 바로 자유의지였다.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를 신학적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온 이유는 성경의 핵심 의제인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자 장영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란 용어가 정의부터 잘못되었다는 진단을 내리며 성경에서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있는지 살펴본다.
저자는 책 속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자유의지란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은 원죄에서 자유롭다는 논리를 만들었지만, 동일한 자유의지가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원죄에 책임이 있다는 정죄로 발전한 것이다. 그 후, 초대교회 시대의 대표적인 교부의 신학적 토대에 교리배경을 둔 수많은 신학교와 신학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유의지를 수용했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의지의 올바른 정의는 ‘그 의지적 결정은 미리 예정될 수 없어서, 그 결과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의지’라고 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면, 그들이 선악 과실을 따서 먹게 되는 것을 하나님조차 예정할 수 없어야 한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진정 있다면, 각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린 후에야 하나님조차도 그 사람이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사람이 아무리 자신이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믿게 되었노라고 해도, 이는 그의 주장일 뿐,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남을 겪은 사람의 영은 항상 하나님 말씀에 영적인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로 창조적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의 말씀은 점차 그 거듭난 영의 사람을 변화시켜 나간다. 이 변화의 시기가 어떤 이에게는 순식간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많은 세월이 지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는 거룩한 말씀을 통해 자신의 비거룩함과 죄악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며 나아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도, 사도 바울도 그리고 예수님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닫게 하시면 누구도 천국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서 영적 죽음 상태의 영을 살아 있게 하셔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열어 주셔야만 천국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고? 성경은 사람의 자유의지란 개념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에 따른 예정의 구절들이 수없이 언급된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요한복음 3장 15-16절의 ‘누구나’는 자유의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 ‘누구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누구나’를 의미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만든 놋뱀이 있었어도,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고침을 받을 수 없었다. 오직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만이 살았다. 놋뱀을 봐야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 놋뱀을 보지 않고 죽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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