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근거하여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한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므로(신 21:23), 그런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는 자들도 동일하게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들을 없애는 것을 하나님은 당연히 기뻐하시리라 믿고 성도들을 가차 없이 핍박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던 것같이 사울도 광야로 데려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이기게 하셨을 것입니다(막 1:12). 예수님과 같이 사울에게도 고난이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막 8:31, 9:12-13; 행 9:16; 고후 11:24-28). 또 광야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것과 같이 사울에게도 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비밀스러운 말씀이 새롭게 임했을 것입니다(롬 16:25-27; 엡 3:1-4; 골 1:25-27). 광야라는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말하다’라는 ‘다바르’에서 유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종들에게 말씀하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최종삼 – 바울로부터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어떤 청년이 “돌아가신 분은 천국에 가셨을 텐데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우는 것은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이다. 신자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들이며, 따라서 이들에게 죽음이란 슬픔이어서는 안 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말은 죽어 사망에 이르는 이들과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 죽음이 신자에게는 영생을 향한 관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라는 흉기를 도리어 변화시키셔서 가장 극렬한 기쁨으로 가는 통로로 만드셨다.
윤석준 – 나실인: 고통의 시대로부터 누가 구원하는가?
네 복음서를 읽으며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예수님에 관하여 잘 요약한 구절은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정점에서 베드로의 고백도 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였으며 예수님 자신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시인하신 것은 누가복음 20:70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요한복음의 결론도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입니다. 이처럼 네 복음서가 내용면에 있어서 일치하고 조화를 이룹니다.
곽병국 - 예수님의 삼 년 반 : 《하모나이즈드 네 복음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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