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혐오하며 배타적인 두려움을 품는 일은 그저 우리에게 즐거움이나 안정감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선호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이때 우리는 ‘타자’에 대한 깊은 공포심에 매인 나머지, 그들을 우리에게서 떼어 놓고 더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거나 추방하고 감금할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며 차별하는 것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의 입국을 허용하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의 배후에는 다음 질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받아 주는데 어느 정도 비용이 들까? 국가의 치안이 약화되지는 않을까? 우리 동네의 부동산 시세가 하락하면 어쩌나? 그 이민자들이 국가 경제에 과연 도움이 될까?” 이 질문들 자체가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논쟁에서 기독교의 기본 입장은 환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런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윌리몬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미술 학도로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먼저 종교화 작가로 규정되는 순간 순수 미술 작가로서 인정받기 어렵고 기능적 프로파간다 작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십자가라는 주제가 너무 현저하고 벌써 2천 년간 소재로 사용되어 이젠 고루한 취급을 받는다. 반면 또 대가들에 의해 나온 시대적 명작들이 이미 너무 많아서 웬만큼 잘 해석해서 뛰어난 솜씨로 그리지 않는 한 그나마 종교 작가로 인정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주제적 어려움이다. 십자가 작품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주제로 구상되는데 십자가를 모독하고 종교와 신화를 거짓으로 규정하여 풍자하는 방향과 십자가를 찬양하는 방향이다. 새롭고 주목받는 시도들조차도 곧잘 십자가를 모독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소변에 빠뜨린 십자가 사진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지양하고 싶은 길이다.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를 찬양하는 방향은 유치하거나 더 이상 새롭게 해석하기 어렵다. 이처럼 십자가는 참 그리기 어려운 소재이다. 오랫동안 십자가를 그리지 않았다.
이성수 – 십자가 묵상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리고 성령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증언하며 감동하게 하기에 진리다. 성경에 대한 오역이나 오해, 오류, 혹은 그것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설교하는 것 등은 모두 사람의 죄성에서 나온 결과들이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인 것은 맞지만 그들에게 언제나 죄악과 악행 또는 부족함 등이 있는 사정과 다를 바 없다. 성도의 회개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래서 믿음의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없어서다. 우리의 회개는 개인적일 수도 있고 공개적이거나 공통적일 수 있다. 그것은 드러내어 고백할 때도 있고 마음속으로 애통하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회개를 가로막을 아무것도 없다.
문태순 – 기독교 강요 뼈대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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